요즘같이 혼란한 시기에 많은 사람들이 평상을 회복하기를 갈망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저마다 혼자만의 공간 속에서 자신을 한번 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평소에 유가(儒家)의 경전을 읽으며 인격수양을 중시하는 선비처럼 수양된 생활을 하는 이들에게는 자연스런 일이겠지만, 치열한 경쟁 속에서 급급히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는 그렇게 할 여유조차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마음의 평정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면 좋은 일을 봐도 만족하지 못하고 목전의 이익을 추구하는 현실에 항상
일찍이 조선의 선조(宣祖)는 이순신(李舜臣)의 학문과 덕업은 중국 한(漢)나라 때 장량(張良)이 황석공에게 전수받은 비서(祕書)에서 전수받은 것이라고 평가하였다. 이는 한(漢)나라 고조 유방(劉邦)이 천하를 통일한 비법이 담긴 책으로, 유학(儒學)의 도덕론을 영향받아 오덕(五德)을 논했다. 특히 이것이 처세(處世)와 치국경세(治國經世)의 원리가 되므로 세인들은 이를 ‘천하경영의 방법’이라고 한다. 이처럼 이순신의 정신과 학문은 수천년 역사 속에서 전해온 천하경영의 도덕론에 기반한 심오한 것이다. 특히 비서의 이론도 유학의 이념인 수
병신년(1597) 겨울 일본은 조선을 재침하기 위해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먼저 부하 요시라(要時羅)를 시켜 이순신을 모함하는 흉계를 꾸몄다. 거짓으로 조선과 수호(修好)를 맺을 것을 청하면서 일본에 있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곧 조선에 올 것이니 이순신으로 하여금 요격하게 하라는 것이었다. 이 내용을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에게 통보하였고, 조정은 절호의 기회로 알고 이순신에게 요시라의 계책대로 출동하기를 명령하였다. 그러나 이순신은 적의 말이 거짓임을 알고 끝내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그 결과, 2월 1일 선조는
옛 현인들은 인격수양을 하고 치국(治國)과 평천하(平天下)의 경영 원리를 탐구하는데항상 덕행(德)을 실천하는 것을 중시했다. 덕이란, 은혜를 베푸는 미덕으로서 나라의 풍속을 순화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체이다. 중국 진(秦)나라 말기의 병법가 황석공(黃石公)이 장량(張良)에게 전수한 천하 통일의 비법도 바로 덕을 수행하는 것이었다.“우선 해야 할 일은 덕을 닦는 것보다 더 먼저할 것이 없다.[先莫先於修德].” -황석공, 《소서》-인간사에서 진리와도 같은 덕은 오덕(五德)으로 발전했다. 이 오덕을 유가에서는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라
1. 《난중일기》와 《서간첩》 이외 또다른 이순신의 작품이 존재하는가? 후대에는 이순신이 직접 작성한 《난중일기》와 《서간첩》(국보 76호)이외에 이순신의 글씨라는 편지들이 매우 많이 전해지고 있는데, 이 중에는 추정작품도 꽤 있지만 대부분이 가짜이다. 필자가 지금까지 감정 의뢰를 받은 것만도 80여 건에 달한다. 특히 일정시대에 위작들이 많이 만들어졌는데, 이는 오래된 장지(狀紙)에 친필을 모사하거나 유사한 필체로 내용을 만들어 쓴 것들이다. 이순신 유물하면 상당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 그와 같이 위조한 것이다. 일반인들이 봐서는
선조 33년(1600) 선조는 이순신의 사당을 세우기 위해 영의정 이항복(李恒福)에게 남방을 순시하여 이순신의 공적을 밝히라는 명을 내렸다. 이에 이항복은 여수의 전라좌수영에 도착하여 여러 장수들과 ‘충성을 표창하고 덕업을 기념하기 위한 일[表忠紀德]’을 모의하였다. 그 결과 최초의 사당이 지어지고 사액이 내려졌는데, 이것이 바로 이순신의 최초 사당인 충민사(忠愍祠)이다. 이 명칭을 계기로 이때부터 이순신을 충민공(忠愍公)이라고도 칭했다. 그후 현종 2년(1661) 남해군 노량에 있는 사당에 우암(尤菴) 송시열이 〈노량묘비(露梁廟碑
몇 년 사이로 이순신정신 배우기 열풍이 불고 있다. 이순신이 4백여 년 전의 인물이지만, 그는 풍전등화에 놓인 국운을 구제한 인물이기에 예나 지금이나 그의 정신이 세인에게 주는 효과는 해가 오랠수록 더욱 빛을 발하는 것처럼 지대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순신을 주제로 한 인문학과 전략, 경영 등 다양한 연구가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그 정신의 바탕은 과연 어디에서 온 것일까. 우선 이순신이 살았던 시대가 유교(儒敎)사회였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바로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함에도 많은 이들이 언필칭(言必稱)
국내의 이순신에 대한 연구는 20세기 중반 홍기문이 최초의 한글판 《난중일기》를 포함한 《이순신의 전집》을 간행한 이후부터 노산 이은상을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물론 19세기 후반의 일본인 장교 시바야마 나오노리(柴山尙則)와 20세기 초반의 일본인 아요야 나기 난메이(靑柳南冥) 등에 의해 연구가 이루어졌지만, 일본어로 되어 있는 한계가 있다. 국내의 20세기 초기 연구자로서 장도빈, 설의식 등도 있지만 연구 규모가 크지는 않았다. 이러한 선행 연구를 말할 때는 표현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보통 창의적인 연구성과를 내면 최초
1592년 연초 조선에는 전운이 감돌아 전쟁을 예견하는 주역점이 유행하였다. 이 때 전통적인 주역점을 간편화한 점법이 등장했다. 본래 주역점은 50개의 시초(蓍草)를 사용해서 18번의 단계를 반복하여 하나의 괘(卦)를 얻으므로, 시간이 오래 걸리고 번거로웠다. 그래서 나온 것이 중국에서 유래한 척전법(擲錢法, 동전점)과 조선의 민간에서 유행한 척자점(擲字占, 윷점)이다. 척전법은 전한(前漢) 때의 역학자 초연수(焦延壽)가 지은 《초씨역림焦氏易林》에서 유래하고, 척자점은 이순신이 주역점과 함께 사용한 점법이다. 임진왜란이 발생한 이후
필자는 지금까지 새로운 난중일기 35일치를 찾아내었고, 최초 한글번역본인 홍기문의 난중일기와 삼국지 인용문, 약포(藥圃) 정탁(鄭琢)의 《임진기록》에서 명나라 담종인의 금토패문 전문 등을 찾아 처음 소개했다. 특히 금토패문은 5년 전에 필자가 완역한 선조의 교서집에 들어 있는 라는 글과 같은 것임을 이미 밝힌 바 있다. 이점에서 세간에는 이순신의 연구와 관련하여 하나의 발굴의 역사를 이루었다는 평가가 있다. 이렇다보니 필자는 이순신 관련한 신자료 제보를 많이 받는 편인데, 편지글, 영
《난중일기(亂中日記)》는 이순신이 7년간의 전쟁 중에 직접 체험한 사실들을 기록한 진중일기이다. 친필 초고본을 보면 급박한 전쟁을 치룬 해일수록 필기상태가 심하게 흘려져 있다. 특히 《임진일기》와 《계사일기》, 《정유일기》에서 그러한 현상이 두드러지는데,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급박했는지를 짐작케 한다. 큰 전쟁이 일어났던 해에 작성된 일기는 분량이 일정하지 않고 수정과 삭제가 반복되고 누락과 훼손상태가 심하다. 1693년(숙종 19) 이후 미상인에 의해 이순신과 관련된 사료들을 모은 필사본 《충무공유사》가 완성되었다. 여기에는 《난
요즘은 한 해를 마감하고 새해를 맞는 의미에서 송구영신(送舊迎新)의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새해에는 잘된 일은 더욱 발전하고 잘못된 일은 다시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아직은 음력설이 오지 않았기 때문에 설 전까지를 세모(歲暮), 세밑, 제월(除月)이라고 한다. 이러한 송구영신의 의미를 전쟁 준비에 여념이 없었던 이순신은 과연 어떻게 느꼈을까. 이러한 내용을 《난중일기》에서 찾아보면 12월의 일기가 있는 《을미일기》와 《정유일기》Ⅱ에서만 확인된다. 다른 일기에는 확인되지 않는다. 《을미일기》12월의 일기를 보면,
이순신의 최후의 죽음에 대해, 후퇴하는 일본군과 노량 관음포에서 격전을 벌이다가 선미의 일본군이 쏜 탄환을 맞고 전사했다는 것은 이미 여러 문헌을 통해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이와 달리 그때“일부로 갑옷을 벗고 자살을 했다”는 자살설도 존재한다. 물론 전쟁 중에 갑옷을 벗는 것은 자살행위이다. 또한 선조의 불신과 당쟁의 갈등으로 인한 정치적인 문제로 인해 자살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렇다면 그러한 자살설의 근거는 무엇인가. 바로 숙종 때 이민서(李敏敍)가 의병장 김덕령에 대해 기록한 《김장군전(金將軍傳)》이라는 평전 내용이다.
1598년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병사하자, 그후 일본군의 철수작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9월 명나라 제독 유정(劉綎)이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부대가 주둔한 순천 왜교성을 공격했는데, 9월 20일부터 10월 4일까지 왜교성 전투가 벌어졌다. 왜교성은 노량해전이 벌어지기까지 일본군의 최후 전략기지로서 노량해전 과정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후 11월 유키나가가 유정과 진린(陳璘)의 허가로 귀환을 시도했으나 이순신의 적극적인 공격으로 탈출이 어려워지자, 남해와 사천, 부산에 있던 일본군이 유
쑥이 삼대 속에 나면 붙잡아 주지 않아도 곧게 자란다고 한다. 이는 봉생마중(蓬生麻中)이라는 고사에서 나온 말인데, 다른 사람의 영향을 받으면 자신도 모르게 저절로 감화되어 발전한다는 의미이다. 이는 특히 주변 환경에 쉽게 반응하는 감수성이 민감한 청소년들에게 필요한 말이다. 이때는 일생을 좌우하는 성격과 생각이 형성되는 시기이기이므로 더욱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항상 올바른 조기교육이 필요하다. 어려서 한번 길들여진 습관은 그것이 좋든 나쁘든 상관없이 평생을 간다. 물론 타고난 성격도 중요하지만 주변 환경에 의해 만들어
지금까지 이순신 유적에 대한 연구가 주로 해전지를 위주로 진행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물론 전쟁의 업적을 우선으로 생각하다보니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난중일기》를 보면, 임진년 초기부터 무술년 전사하기 직전까지 이순신이 부하들과 각 지방의 관리들을 만나기 위해 오고간 내륙의 유적지가 해전지보다 훨씬 많다. 이는 현재 국내에 많이 남아 있지만 대부분 지형의 변화로 찾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필자는 《난중일기》교감완역본의 후속작업으로 수년동안 전국에 있는 임진왜란 및 이순신의 유적지를 답사했다. 이 교감완역본을 몇차례 개정하여 미
서해맹산(誓海盟山)이란 맹세하고 다짐하기를 산과 바다와 같이 영원히 변치 않겠다는 의미로 보통 굳은 약속을 할 때 주로 사용하는 용어이다. 사전적으로는 “맹산서해(盟山誓海)”라는 말이 더 친숙하다. 이 용어는 고전에서 주로 굳은 약속의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본래는 남녀 간의 변치 않는 깊은 사랑에서 유래했다. 중국 송(宋)대 조장경(趙長卿)의 《하신랑(賀新郞)》사와 원(元)대 고식(高栻)의 《집현빈(集賢賓)·원별(怨別)》투곡에서 확인된다. 이러한 서해맹산의 글귀가 전쟁 중에는 변함없는 우국충정을 드러내기 위한 말로 사용되었다. 이순
이순신의 전공에 대한 평가는 사후에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조선 정조(正祖)때에 와서야 비로소 이루어졌다. 1792년 8월 19일 정조는 〈이충무유사〉를 읽고 감동하여 이순신을 표창하기 위해 신도비문을 짓고 이순신의 문집인 《이충무공전서》를 간행하라는 명을 내각에 내렸다. 이는 나라를 위해 큰 공로를 세운 충신에게 보답해야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1793년 7월 21일 정조는 이순신을 영의정에 증직하고, 이듬해 10월 4일 정조가 직접 지은 신도비가 이순신의 묘소 앞에 세워졌다. 비문에 보면, “우리 왕조의 충무공 이순신 같은
전쟁에서는 서로의 정보를 파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나와 상대를 정확히 진단할 때 승패를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순신은 전쟁 중에 항시 부하들을 동원하여 적의 정보를 수집하는 데 주력하였다. 중국 춘추시대 병법전문가 손무(孫武)는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고, 적을 모르고 나를 알면 한번 이기고 한번 진다. 적을 모르고 나도 모르면 매번 싸울 때마다 반드시 위태로울 것이다[知彼知己, 百戰不殆. 不知彼而知己, 一勝一負. 不知彼不知己, 每戰必殆].”라고 하였고, 이순신은 이를 만고불변의 이론이라고 평하였
사람에게는 누구나 과중한 업무로 힘들어할 때가 있다. 많은 일들을 한꺼번에 처리할 수 없기 때문에 일의 경중을 따져서 중요한 일부터 해결해야 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요령껏 하겠지만 지혜롭지 못한 사람은 우왕좌왕하며 요령을 얻지 못할 것이다. 《대학》에 “사물에 본말(本末)이 있고 일에 시종(始終)이 있는데 먼저하고 나중에 할 것을 알면 추구하는 목표에 가까워진다.”고 하였다. 이순신은 전란 중에 일의 경중을 헤아려 선후를 구분했는데, 조선의 요충지를 사수하기 위해 군민(軍民)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급선무로 여겼다. 군민이 해이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