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의 최후의 죽음에 대해, 후퇴하는 일본군과 노량 관음포에서 격전을 벌이다가 선미의 일본군이 쏜 탄환을 맞고 전사했다는 것은 이미 여러 문헌을 통해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이와 달리 그때“일부로 갑옷을 벗고 자살을 했다”는 자살설도 존재한다. 물론 전쟁 중에 갑옷을 벗는 것은 자살행위이다. 또한 선조의 불신과 당쟁의 갈등으로 인한 정치적인 문제로 인해 자살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렇다면 그러한 자살설의 근거는 무엇인가. 바로 숙종 때 이민서(李敏敍)가 의병장 김덕령에 대해 기록한 《김장군전(金將軍傳)》이라는 평전 내용이다.
1598년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병사하자, 그후 일본군의 철수작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9월 명나라 제독 유정(劉綎)이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부대가 주둔한 순천 왜교성을 공격했는데, 9월 20일부터 10월 4일까지 왜교성 전투가 벌어졌다. 왜교성은 노량해전이 벌어지기까지 일본군의 최후 전략기지로서 노량해전 과정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후 11월 유키나가가 유정과 진린(陳璘)의 허가로 귀환을 시도했으나 이순신의 적극적인 공격으로 탈출이 어려워지자, 남해와 사천, 부산에 있던 일본군이 유
쑥이 삼대 속에 나면 붙잡아 주지 않아도 곧게 자란다고 한다. 이는 봉생마중(蓬生麻中)이라는 고사에서 나온 말인데, 다른 사람의 영향을 받으면 자신도 모르게 저절로 감화되어 발전한다는 의미이다. 이는 특히 주변 환경에 쉽게 반응하는 감수성이 민감한 청소년들에게 필요한 말이다. 이때는 일생을 좌우하는 성격과 생각이 형성되는 시기이기이므로 더욱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항상 올바른 조기교육이 필요하다. 어려서 한번 길들여진 습관은 그것이 좋든 나쁘든 상관없이 평생을 간다. 물론 타고난 성격도 중요하지만 주변 환경에 의해 만들어
지금까지 이순신 유적에 대한 연구가 주로 해전지를 위주로 진행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물론 전쟁의 업적을 우선으로 생각하다보니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난중일기》를 보면, 임진년 초기부터 무술년 전사하기 직전까지 이순신이 부하들과 각 지방의 관리들을 만나기 위해 오고간 내륙의 유적지가 해전지보다 훨씬 많다. 이는 현재 국내에 많이 남아 있지만 대부분 지형의 변화로 찾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필자는 《난중일기》교감완역본의 후속작업으로 수년동안 전국에 있는 임진왜란 및 이순신의 유적지를 답사했다. 이 교감완역본을 몇차례 개정하여 미
서해맹산(誓海盟山)이란 맹세하고 다짐하기를 산과 바다와 같이 영원히 변치 않겠다는 의미로 보통 굳은 약속을 할 때 주로 사용하는 용어이다. 사전적으로는 “맹산서해(盟山誓海)”라는 말이 더 친숙하다. 이 용어는 고전에서 주로 굳은 약속의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본래는 남녀 간의 변치 않는 깊은 사랑에서 유래했다. 중국 송(宋)대 조장경(趙長卿)의 《하신랑(賀新郞)》사와 원(元)대 고식(高栻)의 《집현빈(集賢賓)·원별(怨別)》투곡에서 확인된다. 이러한 서해맹산의 글귀가 전쟁 중에는 변함없는 우국충정을 드러내기 위한 말로 사용되었다. 이순
이순신의 전공에 대한 평가는 사후에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조선 정조(正祖)때에 와서야 비로소 이루어졌다. 1792년 8월 19일 정조는 〈이충무유사〉를 읽고 감동하여 이순신을 표창하기 위해 신도비문을 짓고 이순신의 문집인 《이충무공전서》를 간행하라는 명을 내각에 내렸다. 이는 나라를 위해 큰 공로를 세운 충신에게 보답해야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1793년 7월 21일 정조는 이순신을 영의정에 증직하고, 이듬해 10월 4일 정조가 직접 지은 신도비가 이순신의 묘소 앞에 세워졌다. 비문에 보면, “우리 왕조의 충무공 이순신 같은
전쟁에서는 서로의 정보를 파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나와 상대를 정확히 진단할 때 승패를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순신은 전쟁 중에 항시 부하들을 동원하여 적의 정보를 수집하는 데 주력하였다. 중국 춘추시대 병법전문가 손무(孫武)는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고, 적을 모르고 나를 알면 한번 이기고 한번 진다. 적을 모르고 나도 모르면 매번 싸울 때마다 반드시 위태로울 것이다[知彼知己, 百戰不殆. 不知彼而知己, 一勝一負. 不知彼不知己, 每戰必殆].”라고 하였고, 이순신은 이를 만고불변의 이론이라고 평하였
사람에게는 누구나 과중한 업무로 힘들어할 때가 있다. 많은 일들을 한꺼번에 처리할 수 없기 때문에 일의 경중을 따져서 중요한 일부터 해결해야 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요령껏 하겠지만 지혜롭지 못한 사람은 우왕좌왕하며 요령을 얻지 못할 것이다. 《대학》에 “사물에 본말(本末)이 있고 일에 시종(始終)이 있는데 먼저하고 나중에 할 것을 알면 추구하는 목표에 가까워진다.”고 하였다. 이순신은 전란 중에 일의 경중을 헤아려 선후를 구분했는데, 조선의 요충지를 사수하기 위해 군민(軍民)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급선무로 여겼다. 군민이 해이해지
핵심어 : 이순신 난중일기 인문학 고전전문가 요즘 인문학계에는 문학과 사학, 철학 등 각 분야의 많은 전공자들이 꾸준히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한문으로 된 원전을 제대로 번역할 수 있는 전공자는 그다지 많지가 않다고 한다. 이 문사철을 기반으로 하는 인문학적 지식에 원전 해독 능력까지 구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랫동안 한문 고전을 배우고 고전 현대화의 필수조건인 현대국어 이론도 배워야 한다. 결국 한 명의 인문학자가 고전번역을 할 수 있기까지에는 수십 년의 세월을 투자해야 한다. 한문 고전을 사전 없이
인간사회에서 경험지식이란 예기치 않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항상 필요하다. 여기서 경험이란 삶에 도움이 될 정도의 체험수준을 말한다. 그래서 인간사의 경험지식은 항상 삶에 유익하다고 말한다. 중국 한(漢)나라 선제(宣帝) 때의 명신 소광(疏廣)은 “한 가지 일을 경험하지 않으면 한 가지 지혜가 생기지 않는다[不經一事, 不長一智].”고 하였다. 이는 지혜를 터득하기 위해서는 항상 일상에서의 경험이 중요함을 말한 것이다. 충무공 이순신은 전란 속에서 지혜를 터득하기 위한 노력을 끊임없이 하였다. 그는 전쟁을 준비하는 진중(陣中)의 공간
이순신의 문집인 《이충무공전서》가 1795년 처음 간행된 이후 6간 되기까지 선인들의 끊임없는 노력이 있었다. 여기서 특히 주목할 점은 이에 앞서 1707년(숙종 33년)에 이순신의 현손인 이홍의(李弘毅)가 이순신의 유고와 관련 기록들을 모아 《충무공가승(忠武公家乘)》을 간행한 것과 이것이《이충무공전서》의 저본(底本)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해서는 10여 년 필자가 밝히기 전만해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이 두 책의 목차를 서로 비교해 보면, 전서의 윤음(綸音)․비명(碑銘), 권수(卷首) 교유(敎諭)․사제문(賜祭文)․도설(
《난중일기》는 이순신이 7년간의 전쟁을 치르면서 작성한 전쟁에 관한 일기이다. 여기에는 이순신의 구체적인 활약상은 물론, 수차례의 해전 상황과 진영의 상황, 공사간(公私間)의 인사문제와 당시의 사회상 등 다양한 내용들이 망라되어 있다. 이것이 한 개인의 일기이지만, 임진왜란과 관련된 많은 내용들이 수록되어 있으므로, 《난중일기》를 임진왜란의 사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더욱이 《난중일기》는 우리 역사에서 대표적인 위인으로 손꼽히는 이순신이란 인물이 작성한 일기이기 때문에 그를 향한 숭배의식과 함께 이에 대한 관심이 갈수록 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