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심이 천심이라 했듯이 한 나라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위정자는 무엇보다 민생안정에 힘써야 한다. 백성의 뜻을 거스르고서는 나라가 발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민정을 잘 살피고 선정을 베풀기 위해서는 항상 인간사에 기준이 되는 올바른 도리를 따라야 한다. 중국 주초(周初)의 정치가 강태공은 “떳떳한 도리를 따라 보살피면 백성이 편안해진다[因其常而視之, 則民安].
주변인과의 긴밀한 협력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데 관건이 된다. 공동의 협력에서 나온 힘은 한 개인이 주도하는 것보다 몇 배의 추진력이 있다. 때문에 공동체 결속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서로에 대한 배려와 양보로써 의리를 베풀어야 한다. 그러면 상대가 감동하여 더욱 협조할 것이다. 개인의 이익을 뒤로 한 채 항상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상호 결점을 보완하여 노
성패를 가늠하기 어려운 한계 상황에 놓이게 되면 많은 이들이 좌절하게 된다. 그러나 침착하게 사세를 관망하며 결사적인 자세로 노력하면 최악의 상황을 역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실패한 원인을 진단하고 주어진 기회와 상황을 잘 이용하여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전략을 잘 짜야 한다. 죽기를 각오한 자세로 성공에 대한 자신감을 가질 때 반드시 목적을 이룰
《난중일기(亂中日記)》는 이순신이 7년간의 전쟁 중에 직접 체험한 사실들을 기록한 진중일기이다. 친필 초고본을 보면 급박한 전쟁을 치룬 해일수록 필기상태가 심하게 흘려져 있다. 특히 《임진일기》와 《계사일기》, 《정유일기》에서 그러한 현상이 두드러지는데,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급박했는지를 짐작케 한다. 큰 전쟁이 일어났던 해에 작성된 일기는 분량이 일정하지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남에게 덕을 베푸는 일을 미덕으로 여겨왔다. 이것은 인격수양자가 도덕을 실천하는데 있어 중요한 일이며, 인간의 정서를 순화하고 풍속을 바로 잡는데 항상 귀감이 되는 일이다. 진정한 덕이란, 인간 사랑의 정신과 배려심에서 시작되지만, 그렇다고 이를 무조건적인 사랑을 말하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될 것이다. 오히려 선(善)을 권장하는 데는 반
이순신이 전란 중에 주로 사용한 서체가 초서(草書, 한자를 흘려 쓴 글씨)이었다. 현재 남아 있는 이순신의 《난중일기》는 물론, 문서류 역시 초서로 작성되어 있다. 조선시대에 일반 관원들이 백성의 청원서를 받고 답한 제음(題音)을 작성할 때도 주로 초서체를 사용했다. 초서는 한 번에 필획을 이어 쓰는 특징이 있는데, 이것이 알아보기는 어려워도 작성하는데 빠
어떠한 일이든지 중대한 목표를 달성하는 데는 항상 어려운 고비가 따른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남다른 인내심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각오로 노력해도 더욱 어려운 시련에 봉착할 수도 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안녕을 뒤로하고 공익을 우선하는 선공후사先公後私의 자세로 임해야 한다. 이러한 부단한 노력으로 어려운 현실을 타개해 나갈 때 끝내
유능한 인재들의 역할이 국가의 초석이 된다. 국가가 어려운 위기에 놓였을 때는 그들이 지혜를 모아 문제를 해결하고, 발전의 기회를 맞았을 때는 그들이 능력을 발휘하여 도약의 발판을 이룰 것이다. 국가의 흥망도 인재들의 역할에 달려있다. 따라서 국가의 안정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많은 인재들을 양성해야 한다. 인재들의 힘이 결국 국가발전의 원동력이 될
고전번역에서 초서체로 된 고문헌을 해독하는 일이 가장 어렵다. 자칫 글자형태만을 보고 섣불리 판단하면 오판할 수 있으므로, 항상 용례와 전후의 문맥을 잘 따져봐야 한다. 이를 뒷받침 하는 것이 바로 고전해독에 관건인 문리력이다. 그래서 나온 말이 “문팔초이(文八草二)”인데, 이는 초서 글씨 형태보다는 문리력에 더 비중을 둔다는 의미이다. 마치 암호문과도 같
지금으로부터 15년 전 필자는 고전을 연구하는 학도로서 늘 주경야독(晝耕夜讀)하는 생활을 해야 했다. 대학원의 논문 연구를 위해 새로운 문헌을 발굴해야겠다는 열의로 한국과 중국의 수많은 전적들을 찾아가며 연구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때는 고전문헌이 대규모로 DB화 되지 않은 상태라서 지금처럼 고전 검색이 보편화되지는 못했다. 그래서 난해한 용어나 자료를
평소에 주변인들과 항상 친분을 쌓아서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좋다. 남다른 관심과 배려로 상대를 대하면 그도 우호적으로 대할 것이다. 이러한 관계에서 서로 화합을 이룬다면 조난 시에 쉽게 협조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렇게 되기까지는 각별한 성의를 보이는 노력이 필요하다. 평소에 주변인들과 친분을 쌓기 위해 큰 부담 없는 작은 선물을 보내주는
어떠한 일이든지 문제가 자주 발생할 때에는 반드시 그 문제의 원인부터 찾아 해결해야 한다. 또한 지금까지 진행되어 온 일들을 미루어 앞으로의 추이를 관망해야 한다. 이러한 노력을 기울여 남다른 혜안으로 철저한 대비를 해야 한다. 만약 임시방편으로 조치한다면, 당장은 편할지 몰라도 더 큰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아무리 어려운 일도 근본적인 문제를 찾아 해결한
이순신이 쓴 《난중일기》에는 일기 이외에도 잡문 형태의 글들이 많이 실려 있다. 갑오년 11월 28일 이후 기록에는 몇 구절이 별도로 작성되어 있는데, 중국 명초(明初)의 소설가 나관중(羅貫中)의 《삼국지통속연의(三國志通俗演義)》에서 인용한 글들이다. 이는 필자가 밝혀내기 전까지만 해도 그 정확한 출처를 전혀 모르고 그저 이순신이 지은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
미래의 발전을 위해서는 항상 자신을 성찰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오늘 하루를 돌아보고 잘한 일이 있으면 그것을 발전의 계기로 삼고, 잘못한 일이 있으면 그것을 경계의 요인으로 삼아야 한다. 이처럼 일상에서 겪은 일들을 항상 점검하며 자신의 거울로 삼는다면 실수 없이 발전을 거듭할 것이다. 때문에 진정한 자아성찰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과거를 통해 미래를 대비
남이 만들어내지 못한 것을 새롭게 만들어 내는 것이 바로 창조이다. 그러나 그 창조적인 일을 이루어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 남다른 창의력이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무한한 잠재능력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것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깊은 사고력과 관찰력으로 새로운 도전을 해야 한다. 국가발전에 큰 도움이 되는 위대한 창조란 뛰어난 지혜
이순신은 무과 출신의 장수이지만, 어려부서부터 배운 유학(儒學)을 통해 남다른 문인적인 소양을 쌓았다. 특히 그는 서법(書法)에 능하여 글씨를 잘 썼는데, 보통의 장수들에게서 볼 수 없는 일필휘지의 문필력이 있었다. 그가 썼던 서체는 중국 동진(東晉)의 왕희지 서체이다. 거침없이 써내려간 필치는 매우 웅혼(雄渾)하고 아무리 급하게 써도 필획이 정연하고 필법
420년 전 정유년은 이순신에게 있어서 매우 파란만장한 해였다. 개인의 사정이 용인될 수 없는 전쟁 상황에서 그것도 모친의 상중에 출사(出仕)하라는 기복(起復)의 명은 그의 처절한 마음을 더욱더 압박하였다. 모친에 대한 효(孝)도 중요하지만, 국가와 민족을 위한 충(忠)의 실현은 풍전등화(風前燈火)에 놓인 국운을 구원하는 중차대한 일이었던 것이다. 일에는
전쟁에서는 서로의 정보를 파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나와 상대를 정확히 진단할 때 승패를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순신은 전쟁 중에 항시 전쟁 참모들을 동원하여 적의 정보를 수집하는 데 주력하였다. 중국 춘추시대 병법전문가 손무(孫武)는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고, 적을 모르고 나를 알면 한번 이기고 한번 진다. 적을 모르고
이순신은 임진왜란 중 7년 동안 《난중일기》를 작성하여 무술년(1598)년 11월 17일을 끝으로 전사하기 이틀 전까지 일기를 썼다. 이순신의 목숨이 유지되어 최후의 승전하는 날까지 《난중일기》도 생명력을 함께 유지했던 것이다. 이점에서《난중일기》에는 숨 가쁜 그날의 숨소리가 단순한 필묵이 아닌 신필(神筆)에 담겨 지금까지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임진왜란
《난중일기(亂中日記)》의 친필 초고본을 보면 급박한 전쟁을 치룬 해일수록 필기상태가 심하게 흘려져 있다. 특히 큰 전쟁이 일어났던 해에 작성된 일기는 분량이 일정하지 않고 수정과 삭제가 반복되고 누락과 훼손상태가 심하다. 1693년(숙종 19) 이후 미상인에 의해 작성된 이순신과 관련된 사료들을 모은 필사본 《충무공유사》는 매우 중요한 책이다. 여기에 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