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의 《난중일기》는 한문 서체의 하나인 초서(草書)로 작성되어 있다. 급박한 전쟁 상황 속에서 속기하는 데는 이 초서체 글씨가 매우 효율적이다. 얼핏보면 작성자가 임의대로 쓴 것 같지만 초서체에도 일정한 법식이 있다. 단지 풀처럼 흘려 쓸 뿐이지 글자의 형태는 반드시 옛 법첩을 근거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수백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옛 초서글씨를 해독
420년 전 이만 때 조선은 전운이 감도는 상황에서 정유재란이 시작되는 정유년(1597)을 맞게 된다. 일본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거짓으로 조선과 수호(修好)를 맺을 것을 요청하고, 자신의 부하인 요시라(要時羅)를 시켜 이순신을 제거하기 위한 흉계를 꾸민다. 바로 일본에서 곧 돌아올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를 요격하기 위해 이순신을 출동시키라는
이순신은 무과출신의 장수이지만, 본래는 정통 유학(儒學)을 업으로 하는 유가에서 태어나 유학을 독실이 배운 전형적인 선비출신였다. 그가 임진왜란 중에 《난중일기》를 쓰게 된 것도 그러한 문인적인 소양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더욱이 초서(草書)로 일기를 작성한다는 것은 일반 장수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난중일기》를 보면, 그 당시에 유행했던 문서
예로부터 현인들은 난세에 출사하지 않고 은거하며 자신을 수양하기에 힘썼다. 오직 현명하게 자신의 몸을 보존하는 명철보신(明哲保身)만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주역》〈건괘䷀〉초구(初九)에 대해 공자(孔子)는 “세상에 은둔하여 근심하지 않고 남의 인정을 받지 못해도 근심하지 않으며, 태평한 세상에는 나아가고 근심스러운 세상에는 물러난다.[遯世无悶 不
인격 수양에 도움이 되는 도덕성의 내적 기준이 인간 사랑이라면, 외적 기준은 행동 규범이라 할 수 있다. 생각이 아무리 정당해도 행동에 규범이 없다면 끝내 도덕을 실현하기 어려운 것이다. 때문에 대인관계와 사회생활을 원만히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내외의 기준에 맞는 품행을 갖추어야 한다. 언행이 일치할 때 진정한 도덕이 실현될 수 있다. 규범이란, 예(禮)로
1593년 1월 명나라는 벽제관 전투에서 패배한 후 일본과 강화하기 시작하고 심유경(沈惟敬)을 일본에 파견하는 등 전쟁에 소극적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왜군에게 남하하라고 지시했는데 남쪽에서는 왜군의 침탈이 여전히 자행되었다. 이때 이순신은 원균과 이억기와 2차 견내량 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는데, 특히 한산도에서 결사적으로 협심공격하기를 맹세하였다. 이를
쑥이 삼대 속에 나면 붙잡아 주지 않아도 곧게 자란다고 한다. 이것이 곧 봉생마중(蓬生麻中)이라는 고사인데, 다른 사람의 영향을 받아 발전한다는 의미이다. 이는 특히 주변 환경에 쉽게 반응하는 감수성이 민감한 청소년들에게 필요한 말이다. 이때는 일생을 좌우하는 성격과 생각이 형성되는 시기이기 때문에 더욱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항상 올바른 조기교
이순신이 직접 쓴 친필 초고《난중일기》전편은 모두 전쟁 중에 작성된 비망기록이다. 작전 상황에 따른 업무일지처럼 그날그날의 있었던 일들이 최고 지휘관에 의해 집필된 것이다. 치열한 전투를 치른 때일수록 필기상태가 알아보기 어렵게 심한 흘림체로 적혀 있고, 문장형태에도 삭제와 수정이 반복되어 있다. 특히 이러한 열악한 상황에서도 특히 날짜와 날씨, 기후 등이
우리는 요즘 21세기 첨단정보화시대에 살면서 다양한 정보매체를 통해 많은 지식을 접하고 있다. 그렇다보니 아무리 오래된 역사일지라도 관심만 기울인다면 얼마든지 그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물론 역사란 시대적인 상황에 따라 간혹 가려질 수는 있어도 기록으로 남은 역사적 사실마저 속일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연구자는 항상 춘추필법의 공정성을 생
친필본《난중일기》에는 반드시 정본작업이 필요했다. 특히 비슷한 형태의 초서로 작성되어 기존의 해독된 판본에 서로 다른 글자들의 차이가 많기 때문이다. 이러한 원문의 글자를 수정하여 문맥에 맞게 바로 잡는 것을 교감(校勘)이라고 한다. 본래 교감학은 서지학의 하나로서 중국 한(漢)나라에서 유래하고 청(淸)나라 때 학문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최근
자고로 역사적인 인물이 위대한 이유는 그들의 학문과 덕행에 밑바탕이 되는 정신적 사고가 훌륭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인간의 남다른 정신이 곧 모든 덕목에 절대적인 가치의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공자(孔子)는 “배우고 생각하지 않으면 사리에 어두워진다[學而不思則罔]”고 하였다. 군자의 수양을 위해 아홉 가지 생각방법[九思]을 제시하기도
1693년 이후《난중일기》를 초록한〈일기초〉가 담긴《충무공유사》가 이순신과 관계된 어느 누군가에 의해 필사되었다. 필자는 초서로 된 이 책의 전편을 처음으로 완역하였다. 1795년《이충무공전서》가 간행된 이?떨?像歐戍렛?대한 번역은 1916년 조선연구회의 주간인 일본인 아요야 나기 난메이(靑柳南冥)에 의해 일본어로 처음 시도되었다. 그러나 을미일기 5월 2
1597년 5월 21일 평북의 박천(博川) 군수 유해(柳海)가 이순신을 찾아가 자신도 한산도에 가서 공을 세우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면서 그는 그 당시의 형사사건을 전해주었다. 의금부 감옥에 갇힌 이덕룡(李德龍)을 고소한 사람이 옥에 갇혀 세 차례나 형장(刑杖)을 맞고 다 죽어간다고 했다. 또 유향소에서 가장 높은 과천의 좌수(座首) 안홍제(安弘濟) 등이 이
이순신 장군이 전쟁 중?떻錢뮐贅렇?읽고 참고했다고 하면 사람들은 쉽게 믿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나라를 위한 중대한 전쟁을 하는데 소설에 의존할 리가 있겠느냐는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록이란 것은 거짓말을 할 수 없다. 몇 년전 필자?떨?像歐戍렛?적힌 인재의 중요성을 의미하는 구절의 출처를 중국 명초의 소설가 나관중이 지은《삼국지연의》에서 처음으
한문으로 된 고전을 번역하거나 교감을 하기 위해서는 고전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 고전의 영역은 매우 광범위하고 내용이 대부분 난해한 고사와 용어로 되어 있기 때문에 해박한 지식이 요구된다. 한문은 단순한 한자만 안다고 결코 해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한 문장이 가지고 있는 문맥상의 의미와 여러 한자들이 조합되었을 때 2차적으로 생성되는
《난중일기》갑오년 11월 28일 이후 기록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의문의 두 글자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난도(難逃)이다. 이를 글자대로 해석하면 “도망하기 어렵다.”는 뜻이지만, 이것만으로는 어떠한 의도로 작성되었는지를 알 수 없다. 보통은 전후문맥으로 의미를 유추한다. 그러나 이 경우는 두 글자가 따로 독립된 형태로 적혀 있기 때문에 정확한 의미 파악이 되
인간사회에서 인간의 도리에 대한 추구는 예나 지금이나 항상 중요하게 인식되어 왔다. 그때마다 유학(儒學)이 올바른 가치관을 형성하는데 절대적인 기준이 되었다. 바로 유학에서 제시하는 덕목이 인성교육의 근본이 되기 때문이다. 옛 선현들은 항상 인격수양을 통해 심성을 길렀는데, 역사적인 인물들이 위대한 이유는 이런 바탕 위에서 소양을 쌓고 이상적인 도덕을 실천
이순신은 무과출신의 장수이지만 어려부서부터 문인적인 소양을 쌓았기 때문에 보통의 장수들에게서 볼 수 없는 문필력이 있었다. 특히 그는 중국 동진(東晉)의 왕희지 서체로 거침없이 써내려가는 매우 웅혼(雄渾)한 글씨를 썼다. 아무리 급하게 써도 필획이 정연하고 필법에 어긋남이 없었다. 이러한 필치에서 그의 섬세한 정신력과 강인한 기상을 엿볼 수 있다.그는 임진
자고로 문치주의가 번성한 시대일수록 항상 백성과의 소통이 잘 되었다. 위정자가 백성들과 함께 즐거움을 누린다면 백성들이 따르는 것은 물이 아래로 흐르는 이치와 같은 것이다. “인간의 도는 정치에 민감하게 나타난다.[人道敏政]”고 했으니, 정치를 잘 해야 민생이 안정됨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 점에서 위정자는 항상 민의를 잘 살펴야 한다. 공자가 “백성
일상의 모든 일을 성심으로 대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하면, 그 일의 상태가 어떻든 간에 항상 자신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다. 즉 잘될 일은 더욱 발전을 거듭하고, 불가능한 일은 가능하게 된다. 그것은 성심이 자신에게는 남다른 저력을 만들어줄 뿐 아니라, 남들이 신뢰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결국 자아실현은 물론 사회성취에 있어서도 밑바탕이 되어 줄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