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론

  《난중일기(亂中日記)》의 최초 전사본(傳寫本)으로는 1693년(숙종 19) 이후 미상인에 의해 작성된 《충무공유사》에 들어 있는 〈일기초日記抄〉를 들 수 있다. 여기에는 기존 《난중일기》에 없는 32일치를 포함하여 총 325일치의 분량이 들어있고, 첨지(籤紙)를 붙여 적은 일종의 교감형태로 적은 글자들도 있다. 이은상이 처음으로 이를 인용하여 무술일기의 일부를 교감하여 난중일기 번역본에 포함시켰다.

  1795년(정조 19) 정조는 이순신의 일대기를 적은 〈이충무유사〉를 읽고 감명을 받아 원임 직각(直閣) 윤행임과 검서관 유득공에게 이순신의 문집《이충무공전서》 간행을 명했다. 이때 왕명에 의해 《난중일기》가 처음 해독되고 정유동주자(丁酉銅鑄字)로 간행되었다. 그후 1855(철종6년)년 한성부 내각에서 중간본을 간행하고 다시 1915(대정(大正) 4년) 이병모와 통영인쇄소가 삼간본을 간행했다. 그후 최남선이 신활자본으로 간행하고 이관화, 서장석 등에 의해 모두 여섯 차례 간행되었다.

  그런데 이 전서본의 《난중일기》는 친필 초고본에 비해 일부 내용이 누락되거나 산절되고 변형된 내용들이 종종 실려 있다. 이것이 후대에 교감대상이 되었지만, 날짜에 있어서는 초고본보다 더 많고 초고본에 없는 내용도 실려 있다. 전서본의 판본이 비록 불완전한 형태로 간행되었지만, 국가사업으로 최초로 간행된 점에서 의미가 크다.

  그 후 1935년 일본인이 주축이 된 조선사편수회(이마이다 기요노리(今井田淸德) 회장)가 《난중일기》전편을 다시 해독하여 《난중일기초》를 간행했다. 글자의 위치와 크기를 그대로 살려 지우거나 삭제한 글자를 그대로 표기하고 초고본의 원형에 가까운 해독을 하였다. 그러나 원문의 오기는 교감하지 않았고 오독한 글자가 상당수 있었다. 필자가 《난중일기》를 교감한 결과, 일본인의 해독본에 심각한 문제점이 있는 것을 확인했는데, 후대인들이 오류가 있는 이 해독본을 인용하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본래 교감(校勘)이란, 판본상의 오류를 바로잡는 교정(校正) 작업이다. 중국 북경대학의 예기심(倪其心) 교수는 “교감작업의 궁극적인 목표는 원문을 원래대로 복원하는 것(存眞復原)이다.”라고 말했다. 결국 교감은 원문의 오류를 바로잡아 정본을 확정하는 것이다. 필자는 《난중일기》정본을 만들기 위해 〈일기초〉·전서본·《난중일기초》등의 이본들을 모두 정리하여 비교분석하였고, 이본간의 차이점들을 적시하여 마침내 모든 오류를 바로잡을 수 있었다.

  국가기록유산 사이트에 실린 전적문화재류 DB내용은 모두 교감되지 않은 상태로 올려져 있고 난중일기도 마찬가지다. 이것이 15년전 그 당시 해독지침이었다. 이를 교감본과 비교하면 당연히 차이가 있는데 이 교감되지 않은 글자들을 오류라고 말해서는 안될 것이다. 원래 교감되지 않은 초고상태의 글자와 오타는 분명히 다르다. 오래전 《난중일기》 DB에 일부 오타가 있었지만 이는 전산 오류였고 이미 이를 포함한 내용이 책자에 바르게 수정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친 《교감완역 난중일기》는 이미 학계에 검증을 받고 세인들에 의해 널리 회자(膾炙)된 바 있다.  간혹 교감에 대해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교감학이란 1, 2년이 아닌 수십 년 이상 고전연구를 해야 하는 어려운 분야인데 이러한 수련 없이는 정론을 내기가 어려울 것이다. 더욱이 이순신에 대한 낭설과 자살설 등의 문제점을 철저하게 규명해야 하는 상황에서 어떤 이론을 주장하려면 먼저 학계에 논문으로 검증부터 받아야 한다. 그렇지 못한 주장은 혼란만 초래하여 세인의 공감을 얻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공자가 간색이 정색을 가리는 것을 증오한다고 말한 것도 정론을 지향하기 위한 이론이라고 말할 수 있다.

   글: 노승석 이순신 연구가(교감완역 난중일기, 이순신의 승리비결 저자)

노승석
저작권자 © 데일리그리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