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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의 窓]《이충무공전서》의 올바른 이해

노승석의 이순신의 窓

| 한문학 연구를 35년간 했으며 전문번역가로서 다년간 고전번역을 해왔다. 난중일기의 교감학적 검...

[이순신의 窓]《이충무공전서》의 올바른 이해
  • 노승석
  • 승인 2019.07.19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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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일기 초고와 이본의 차이

   이순신의 전공에 대한 평가는 사후에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조선 정조(正祖)때에 와서야 비로소 이루어졌다. 1792년 8월 19일 정조는 〈이충무유사〉를 읽고 감동하여 이순신을 표창하기 위해 신도비문을 짓고 이순신의 문집인 《이충무공전서》를 간행하라는 명을 내각에 내렸다. 이는 나라를 위해 큰 공로를 세운 충신에게 보답해야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1793년 7월 21일 정조는 이순신을 영의정에 증직하고, 이듬해 10월 4일 정조가 직접 지은 신도비가 이순신의 묘소 앞에 세워졌다. 비문에 보면, “우리 왕조의 충무공 이순신 같은 이는 그 공로가 오직 비명(碑銘) 짓는 법에 맞으니, 내가 비명을 짓는데도 오히려 부끄러움이 없다.”고 찬술의 의미를 부여하였다. 이어 이순신의 출신과 주요 해전을 언급하고 특히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이 전사한 상황을 기록했다.

   1795년 9월 14일 윤행임과 유득공에 의해《이충무공전서》가 완성되었는데, 이순신의 사적과 유고, 장계, 난중일기 등 이순신과 관계된 모든 기록들이 망라되었다. 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서(弘齋全書)》의 〈군서표기(羣書標記)〉에 이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다.

  마침내 공사간의 기록을 널리 채집하여 충무전서를 만들고 첫머리에 교유, 사제문, 도설, 세보, 연표를 싣고 그 다음에 시문, 그 다음에 장계, 그 다음에 난중일기를 싣고, 다시 비문, 장계, 사기(祠記) 및 후인들이 기술한 글들을 부록으로 6권을 만들어 뒤에 붙여서 을묘년에 비로소 완성하였다.

   이처럼 왕명에 의해 국가사업으로 간행된 《이충무공전서》는 일반적인 한 개인의 문집과는 차원이 다르다. 이것이 오늘날 이순신을 연구하는데 필수교재가 되고 있지만, 전서본의 초간본과 후대의 이본들이 아직 미정리된 상태다. 특히 전서본의 《난중일기》내용이 편집과정에서 초고본과의 차이점이 생긴 것은 아쉬운 일이다. 하지만 이는 긴 문장을 줄이거나 의미가 통하지 않는 글자를 다른 글자로  교정한 일종의 교감(校勘)을 진행한 것이다. 교감이란 글자 또는 문맥상의 오류 및 중복되거나 복잡한 내용을 교정하는 것으로, 이는 교감학, 판본학 등의 전문영역에서 주로 다루는 고도의 연구방법이다.

   유독 전서본 난중일기가 초고와 차이가 있는 형태로 간행되었지만, 그렇다고 《이충무공전서》의 가치를 함부로 폄훼해서는 안될 것이다. 여기에 실린 초고와 다른 글자는 한자 분류 방법인 육서(六書)의 가차(假借)법, 또는 동음가 사용법에 의해 표기한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획수가 많고 어려운 한자를 다른 쉬운 한자로 대체하는 것은 옛날의 통용된 한자 표기법이었다. 이러한 표기 방법을 모르면 오류로 착각할 수도 있다. 따라서 전서본의 《난중일기》 글자가 설사 초고와 다르더라도 이것을 기록할 때는 결코 오류가 아니라 “이본의 글자”라고 해야 바른 표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글 : 노승석 이순신연구가(교감완역 난중일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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