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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야사-삼성 그룹 편
기업야사-삼성 그룹 편
  • 도라희
  • 승인 2019.12.23 11: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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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삼성
사진 = 삼성

[데일리그리드=도라희] 창업주 고 호암 이병철 회장은 1938년 3월 삼성상회를 창업했다. 일제강점기 시절인 그당시 협동정미소 주인이던 이병철이 대구부 수동(현 인교동)에 삼성상회를 개업한 것이 그룹의 시초이다.

◆ 창업과 폐업
당시 29세였던 이병철은 경상남도 김해에서 농지 투기에 실패한 후 심기일전을 굳히며 자본금 3만 원(2010년 기준 약 3억원 상당)으로 삼성상회를 세우게 되었다

옛 삼성상회 건물은 1997년 노후화로 인해 철거되고 대신 그 자리에는 높이 5.95m, 너비 8.7m의 삼성상회 재현 벽과 삼성상회 실물을 250분의 1로 축소한 청동 모형으로 구성된 작은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처음에는 농산물 판매와 별표국수 판매 등 가볍고 기본적인 것만을 판매했다.

고 이병철의 장남  이맹희의 회고록에 따르면 "당시 삼성상회는 지금의 삼성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으며 국수공장이 매출은 늘었지만 그 돈을 모두 공장 설비 투자에 쏟았고 일가 역시 공장 귀퉁이에서 새우잠을 잤을 정도로 공장 상태가 열악하였다"고 말했다.

그야말로 최악의 환경이었다. 당시 별표국수가 많이 팔려 매출액도 올라갔지만 대구(1981년 6월 30일까지 대구는 경상북도였다.)에는 경북에서 1위를 차지하는 소표국수가 있었고, 2위인 풍국면도 있었다. 풍국면은 지금도 대구광역시 북구 만평네거리 북쪽 근처에 공장이 있으며 현재는 범 삼성가에 속해있는 신세계그룹의 국수 OEM 회사다.

◆ 정경유착...대기업으로 발전
사업확장 1942년 조선양조를 인수해 사업 확장의 발판을 마련한 후 1948년 서울 종로2가에서 조홍제와 함께 삼성물산공사로 재출범했다. 1950년 6.25 전쟁으로 부산으로 피난을 떠나 '삼성물산'으로 사명을 변경했으며 전쟁 이후 국가를 지불보증인으로 세워 차관을 받아오면서 정경유착을 통해 점차 대기업으로 성장하게 된다.

1953년 제일제당을 세워 처음으로 제조업을 시작해 국산 설탕을 개발했고 1954년 제일모직을 세워 국산 양복지 '골덴텍스'를 개발해냈다. 1958년 안국화재를 인수해 금융업에도 처음 진출하고 이듬해에 국내 재벌 중 최초로 비서실을 설치해 기업집단으로서의 모양새를 갖췄다.

1963년에 동방생명 및 동화백화점을 세트로 인수했다. 1965년 중앙일보를 창간해 언론사업에도 진출하고 신문용지 자체 수급을 위해 새한제지도 인수했다.

◆ 사카린 밀수사건...부자간 갈등
1966년 5월 24일 삼성이 경남 울산시에 공장을 짓고 있던 한국비료가 사카린 2259 포대(약 55t)를 건설자재로 꾸며 들여와 판매하려다 들통이 난다.

뒤늦게 이를 적발한 부산세관은 같은해 6월 1059 포대를 압수하고 벌금 2천여만 원을 부과했다.

사카린 밀수를 현장지휘했다고 밝힌 이맹희씨가 1993년 발간한 《회상록 - 묻어둔 이야기》에서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사건은 박정희 대통령과 이병철 회장의 공모 아래 정부기관들이 적극 감싸고 돈 엄청난 규모의 조직적인 밀수였다고 고백했다.

이병철 회장은 그당시 잠시 이맹희에게 삼성그룹의 경영을 맡겼지만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6개월도 안돼 물러나고 말았다. 삼성그룹의 대권이 장남인 이맹희가 아닌 3남 이건희에게 넘어간 것은 이병철과 이맹희의 갈등 때문이었다.

삼성에서 쫓겨난 이맹희는 대구와 부산 국내 산간벽지를 떠도는 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병철은 사업에서 물러났다가 18개월 만인 1968년 2월에 다시 복귀했다. 이때 장준하 등 야당인사는 박정희 등이 특정 재벌을 비호한다며 비판하기도 했고, 국회에서도 문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병철은 주변의 반대와 비판을 극적으로 극복하고 다시 경영에 복귀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아들인 이창희 등 만이 처벌되고 이병철에게는 아무런 제재도 가해지지 않았다. 3남인 이건희는 이 기간 중 사카린 밀수 사건을 수습하고 삼성그룹의 안정을 위해 노력했다. 아버지 이병철이 삼성의 경영에 복귀한 뒤에는 1968년 삼성전자 부사장이 됐다.

사카린 밀수 사건이 이토록 국가적으로 거대한 파문이 일어난 것은 크게 두가지 이유가 있다. 첫번째는 박정희 정부가 내걸은 국정 구호가 구악 일소, 즉, 부패척결이었는데 이번 사카린 사건으로 정권의 모순이 드러났다는 점이었고 또, 두번째는 당시 삼성家에서 중앙일보를 세우고 언론계에 진출할 시기와 맞물렸다는 점. 그렇기에 사카린 사건에 대한 경쟁사 언론들의 공격이 따가웠던 것이다. 이러한 복합적인 작용으로 사카린 사건은 전국민적, 전국가적으로 큰 파장이 일었다.

삼성은 한국비료 공장을 짓기 위해 일본 미쓰이사로부터 정부의 지급보증 아래 상업차관 4천여만달러까지 들여왔다.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이병철 회장은 한국비료를 국가에 헌납하고 경영 일선에서 잠시 물러났으나, 1968년 경영 일선에서 복귀한 후 전자산업 진출을 선언해 수원 공단부지를 매입했고, 이듬해 삼성전자 및 삼성-SANYO전기를 세웠다. 이후 1970년 삼성NEC를 세워 전자사업 확장을 개시하며 1973년 제일합섬, 임피어리얼, 1974년 삼성석유화학 등을 세우며 화학이나 서비스분야 등에도 영역을 확장했다.

같은 해 한국반도체를 인수해 반도체산업에 처음 손을 뻗고 1975년에 국내 기업 최초로 공개채용을 실시했다. 1976년 본사를 태평로 신사옥으로 이전하고 1977년 삼성종합건설을 세워 건설업에도 손을 뻗고 1979년에 삼남 이건희가 부회장이 되면서 2세 경영체제를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사진 = 삼성 이재용 부회장
사진 = 삼성 이재용 부회장

◆ 삼성의 사건 사고
삼성은 사회 각층에 로비를 벌이고 있다는 의혹이 있어서 '한국은 삼성 왕국이다'라는 말로 비판을 받는다.

2007년 10월 30일 삼성의 전 법무팀장이었던 K씨의 삼성 비자금 관련 폭로로 검찰 및 시민단체에 전방위적 로비를 하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삼성특검을 실시됐다. 추미애는 삼성이 거액의 선거 자금을 제의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떡검, 삼성장학생 등의 풍자 용어도 삼성 비판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이다.

삼성은 사카린 사건 외에도 많은 사건 사고가 벌어졌다.

구포역 무궁화호 열차 전복 사고(龜浦驛無窮花號列車顚覆事故)는 1993년 3월 28일 오후 5시 30분에 부산직할시 (現 부산광역시) 내에 있는 경부선 하행선의 구포역 인근 삼성종합건설의 공사현장에서 무궁화호 열차가 전복되어, 78명의 사망자와 198명의 부상자를 낸 사고이다.

이 사고로 1977년 이리역 폭발 사고 당시 사망자수를 경신한 대한민국 최악의 철도사고로 기록된다.

공사 시 행정 관련기관의 승인을 받은 뒤 시행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삼성종합건설[5]이 이를 무시하고 열차 운행선의 노반 밑을 관통하는 지하 전력구를 설치하기 위한 발파작업을 임의로 시행함으로써 사고가 발발했다.

이후 삼성종합건설은 해당 법률 위반으로 2550만원의 과징금과 함께 당시 최고수준의 행정처분인 6개월 영업정지와 사장이 구속됐으며, 1996년에 삼성물산(주)에 흡수합병된다.

◆ 삼성 X파일 사건

삼성 X파일 사건 또는 안기부 X파일 사건이라불리는 이 사건은 2005년 7월, 문화방송(MBC)의 이상호 기자가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의 도청 내용을 담은 90여분짜리 테이프를 입수해 삼성그룹과 정치권·검찰 사이의 관계를 폭로한 사건이다.

중앙일보의 홍석현 회장이 삼성그룹의 이학수 부회장에게 신라호텔에서 1997년 대선 당시 특정 대통령 후보에 대한 자금 제공을 공모하고 검사들에게 뇌물을 제공한 것을 보고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이 사건을 통해 고질적인 정경유착, 문민정부를 자청했던 김영삼정부의 불법 도청 사실, 국가정보기관에 의해 일상적으로 행해진 광범위한 불법 도청 문제, 사건 수사 기관 선정 및 수사 방법, 삼성그룹에 대한 소극적 수사, 국민의 알권리 충족 문제, 언론의 보도 경향, 재판의 공정성 등이 도마에 올랐다.

◆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저가 배정 사건

삼성 에버랜드 전환사채 헐값 배정 사건 또는 삼성 에버랜드 전환사채 편법 증여 사건은 1996년 삼성에버랜드가 전환사채를 낮은 가격에 주주 우선으로 발행한 이후 기존 주주들이 인수를 포기해 결과적으로 이재용에게 배당한 사건이다.

이는 삼성그룹 회장인 이건희가 아들인 이재용에게 경영권을 인계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 바 있다. 이 사건으로 당시 삼성에버랜드 전·현직 사장들이 배임 혐의로 기소되어, 2심까지 유죄 판결이 나오기도 했고, 이후 삼성특검의 출범으로 이건희 회장 등도 동일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최종적으로 모두 무죄가 선고됐다.

이와 별개로 이건희 등 제일모직 이사진을 상대로 소액주주들이 낸 소송은 2011년 2월 민사 재판에서 배임을 인정하여 제일모직에 130억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이 나왔다. 이는 2012년 8월 고등법원 판결에 대해 이건희 회장이 상고를 포기하면서 확정됐다.

◆ 삼성1호-허베이 스피릿 호 원유 유출 사고
삼성1호-허베이 스피릿 호 원유 유출 사고는 2007년 12월 7일 충청남도 태안군 앞바다에서 홍콩 선적의 유조선 '허베이 스피릿 호'(중국어: 河北精神號, Hebei Spirit)와 삼성물산 소속의 '삼성 1호'가 충돌하면서 유조선 탱크에 있던 총 12,547킬로리터(78,918 배럴)의 원유가 태안 인근 해역으로 유출한 사고이다. 일반적으로 태안 기름 유출 사건 등으로 불린다.

초기에 파도가 심해 빠른 대처를 하지 못했고 오일 펜스를 넘어 기름이 유출해 피해가 더 증가했다.

파손된 유조선은 2일 만에 구멍을 막았다. 9천여 명 가까이 되는 많은 인원이 기름 제거 자원봉사에 투입되어 기름을 제거하고 있으나 잘 알려지지 않은 어촌마을 등은 아직 지원이 많지 않은 상태이다.

이로 인해 태안군의 양식장, 어장 등 8천여 헥타르가 원유에 오염되었으며 철새 도래지인 천수만까지 위협하고 있다.

◆ 회장 지시사항...바지금관리
2007년 10월 29일 삼성그룹의 전직 법무팀장 A씨는 천주교 모 제단과 함께 삼성그룹의 50여억원의 비자금을 자신이 관리해왔다고 폭로했다. 또한 검찰 및 시민단체에 대한 로비를 이건희 회장이 직접 지시했다는 문건을 공개했으며 삼성그룹에서는 그러한 문건의 존재를 확인했다. 이후 A씨는언론사와의 인터뷰를 통해 삼성그룹의 비자금 조성 방식과 전방위적 로비의 실체, 삼성그룹 고위 임원들의 과도한 충성의 모습들을 공개했다.

이들이 공개한 "회장 지시 사항"이라는 제목의 문건에서는 "호텔 할인권을 발행해서 돈 안받는 사람(추미애 의원 등)에게 주면 부담 없지 않을까? 금융관계, 변호사, 검사, 판사, 국회의원 등 현금을 주기는 곤란하지만 호텔 할인권을 주면 효과가 있는 사람들에게 적용하면 좋을 것"이라는 글과 "와인을 잘 아는 사람에게 와인을 주면 효과적이니 따로 조사해볼 것. 아무리 엄한 검사, 판사라도 와인 몇 병 줬다고 나중에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글이 등장했다.

2007년 11월 5일 28쪽짜리 반박 자료에서 삼성은 A씨의 주장들을 반박했다.

삼성은 이 문서를 통해 비자금과 분식회계의 존재를 부인했고, 차명계좌는 구조본 시절 동료의 부탁으로 만든 것이며, 검찰과 법원에 대한 로비도 근거 없다고 말했다.

또 제시된 문건의 내용도 단지 검토하는 차원이었으며, 기업 법무실에서 수사를 방해하거나 위증 교사한 적 없고, 에버랜드 판사에 30억을 갖다주라고 했다는 지시도 사실관계가 맞지 않다고 주장했다.

결국 특검은 삼성 에버랜드 사건과 삼성SDS 사건, 삼성화재 횡령 및 증거인멸 사건만을 기소한 채 나머지 대부분의 의혹에 대해서는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일각에선 수사의 범위가 너무 광범위해 지방 검사에게 넘겨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었으나, 그대로 수사를 종결 후 주요 관련자들을 불구속 입건하는데 그쳐 "면죄부 특검"이라는 비난이 있었다.

◆ 용산4구역 철거현장 화재
이 사건은 2009년 1월 20일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강로 2가에 위치한 남일당 건물 옥상에서 점거농성을 벌이던 세입자와 전국철거민연합회(이하 전철연) 회원들, 경찰, 용역 직원들 간의 충돌이 벌어지는 가운데 발생한 화재로 인해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한 사건이다.

◆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또는 최순실 게이트는 최순실이 박근혜 정부의 국정에 개입했다는 것과 미르재단·K스포츠재단의 설립에 관여해 그 재단을 사유화한 사건과 최순실의 딸 정유라가 특혜를 받은 사건 등을 포함하는 사건이다. 공식 명칭은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 사건이다.

이일로 2016년 12월 3일 오전 4시 10분에 더불어민주당 · 국민의당 · 정의당 야3당과 무소속 의원 171명은 민주당 우상호, 국민의당 박지원, 정의당 노회찬 원내대표 등 야3당 원내대표 대표발의로 '대통령(박근혜) 탄핵소추안'을 국회에 제출했으며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는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인용, 심판 중 임기 종료로 퇴임한 박한철 전 헌법재판소장을 제외하고, 심판에 참여한 재판관 8명 전원이 인용 의견을 내 박 전 대통령의 임기는 종료됐다.

이외에도 삼성 증거 인멸 및 주가 분식 회계 사건, 이건희 과징금 조세저항, 영훈국제중학교 부정 입학 비리 사건, 삼성그룹 일가 병역면제 등  크고 작은 사건 사고가 줄을 이었다.

2013년에는 이병철 선대회장의 상속재산을 둘러싸고 이맹희와 이건희는 법정다툼을 벌였다.

이건희에 따르면 이맹희는 '30년전에 자신을 군대에 고소하고 아버지를 형무소에 넣겠다고 하고 청와대 그 시절에 박정희 대통령한테 고발했다가 가문에서 이미 퇴출당한 양반'이라며, '자기 입으로는 장남이다 그러지만 이미 아버지께서 "맹희는 완전히 내 자식 아니다"라고 못 박았으며, 지금도 자신을 포함해서 누구도 장남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 소송에서 법원은 상속회복 청구권의 소멸시효가 지났고 재산의 동일성을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이건희 회장의 손을 들어줬다. 이맹희는 이어 항소를 했으나 2심에서도 패소한다.

◆ 프로야구단 창단...신경영 선언
1980년 한국전자통신을 인수한 이후 1982년 프로야구단 삼성라이온즈를 창단하고, 1983년 국내 최초로 64K D램 개발에도 주도했다.

1985년 삼성데이타시스템을 세워 정보통신 사업에도 진출했고 1987년에 삼성종합기술원도 세웠다. 그해 11월 이병철 회장이 숨지자 이건희 부회장이 가업을 이어받아 12월부터 회장이 됐고, 1990년대부터 친족분리를 진행해 1991년 신세계백화점과 전주제지, 1993년 제일제당을 각각 분리시켰다.

1993년 '신경영 선언'에 따라 로고와 기업이념 등을 바꾸고 1995년 국내 대기업으로서 최초로 소그룹 제도를 도입했고, 1995년에 삼성자동차를 세워 자동차 진출을 시작했다. 1997년 불어닥친 외환위기로 구조조정을 거듭 단행해 2000년에 삼성자동차를 프랑스 르노-닛산 얼라이언스에 팔았고, 2008년 서초 삼성타운으로 본사를 이전했다.

2014년 삼성종합화학 등 4개 석유화학계열사를 한화그룹에 매각했고, 2015년 (신)제일모직이 삼성물산을 역합병해 '통합 삼성물산'을 출범시켰다.

2016년 삼성정밀화학과 삼성SDI 케미컬사업부문을 롯데그룹에 팔고 2017년 2월 미래전략실 해체를 선언했다. 이에 따라 계열사별 독립/자율경영체제 전환 수순을 밟게 됐다.

당시 홈페이지를 보면 '삼성'이라는 이름에는 끝없는 확장을 지향하고 있다. 삼(三)은 크고 많은것, 강한것 라는 뜻을 지녔기 때문에 우리 민족이 가장 좋아하는 숫자며, 성(별)은 밝고 높고 영원히 깨이 빛난다는 의미'로 삼성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하지만 삼성의 창립시기가 일제의 잔재가 남아있는 수준이 아니라 사실상 일제나 다름 없었다는 점, 창업주인 이병철 회장이 일본에서 유학했다는 점을 들어 당대의 유명한 일본 기업들의 이름을 따라 비슷하게 지었다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 기업의 특징...법조계, 정관계 인맥 형성
기업출범 초기 IT의 볼모지였던 한국에서 남들이 하지않았던 새로운 시장에 도전하고 멈추면 도태된다는 위기의식이 삼성을 끊임없이 질주하고 발전하게 스스로를 훈련시킨다. 이러한 삼성의 특징은 20세기 최고의 기업 역전 사례로 손꼽히는 명성의 근원이다.

다소 부정적인 견해로는 법조계를 비롯해 정관계 인맥을 넓게 잘 형성해 놓았다. 특히 뇌물수수 사건을 고발한 노회찬 의원의 의원직을 잃게 한 사건도 유명하다.

지난 2005년 참여정부 시절 안기부 삼성 엑스파일 떡값검사 실명을 공개한 진보정의당 노회찬 의원이 지난 14일 대법원 유죄 판결로 의원직을 잃었다.

◆ 삼성 본사...사옥 이전
삼성전자의 "공식적인" 본사는 수원. 회사의 법적 주소도 수원이다. 그 이유는 이병철 회장이 전자사업을 시작할때 수원시 영통구 매탄3동에다 엄청나게 큰 땅을 사서 공장을 지어 시작했기때문이다.

2008년에 중심지를 서울특별시 서초구로 옮겼다.

그러나 이재용 부회장이 경영 전면에 등장한 이후 사옥은 또 다시 재배치됐다. 이 부회장이 계열사의 현장 중심 경영을 강조하면서 서초사옥에 있던 삼성전자와 삼성물산을 내보냈다.

삼성전자 회사 본부는 수원 디지털시티로 이전했고 R&D와 디자인 관련 부서는 우면동의 R&D캠퍼스로 이사를 갔으며 자금과 홍보 담당 부서는 구 태평로 사옥으로 돌아갔다. 삼성물산 역시 서초사옥을 떠나 상일동(건설)과 잠실(상사), 도곡동(패션)과 용인 에버랜드(리조트)로 각각 흩어졌다.

삼성전자와 삼성물산이 떠난 서초사옥에는 삼성생명과 삼성화재, 삼성증권 등 삼성 금융 계열사들이 자리를 잡았다.

창업주 호암 이병철 회장이 제일제당에서 미풍이라는 조미료를 냈지만, 미원의 아성을 넘어서질 못했다. 덕분에 이병철 회장은 살아서 꼭 이루고 싶은 목표 중 하나가 미원보다 미풍이 잘 팔리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 삼성그룹의 해체
삼성은 지주회사로 전환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순환출자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삼성물산이 지주회사 역할을 하고 있다.

삼성물산이 삼성생명을 지배하고 삼성생명이 삼성전자를 지배하고 삼성전자가 삼성카드를 지배하고 삼성카드가 다시 삼성물산을 지배하는 순환출자 구조. 사실상 너무 덩치가 커져버린 삼성전자를 오너 일가가 직접 지분으로 지배하기 힘들기 때문에 삼성생명의 자금을 이용해 지배하는 구조다. 한국의 전형적인 재벌 구조다.

단 2011년 금융 산업의 구조개선에 관한 법률에 의거 순환출자 구조 탈피 선언을 한 바 있으며, 2014년 이건희의 심장마비 입원으로 인해 이건희 유고상황을 대비 경영권 방어가 필요해지면서 급속도로 지배구조가 변동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삼성그룹 사업체는 무조건 우리은행만을 유일한 거래처 은행으로 취급한다. 우리은행의 외환실력을 쌓는데 결정적인 공로를 하는 중이다.

우리은행의 외국 지사 역시 삼성그룹 현지법인의 주거래은행이다. 원래 삼성그룹은 한일은행이 1958년 불하과정을 통해 초기 민영화될 때 한일은행을 소유했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 때부터 한일은행에 모든 거래처를 몰빵하고 유지한 관계를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 우리은행의 한국 제외 외국 파견지점을 보면 죄다 삼성그룹의 외국지사가 있는 도시에 같이1+1 파견되어 있다.

2017년 초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여파로, 삼성그룹은 그룹의 경영을 총괄하던 미래전략실의 해체 계획을 발표했다. 미래전략실은 삼성의 계열사(관계사)들을 수직적 지배하는 조직으로써, 미래전략실의 해체는 삼성그룹의 해체를 의미했다.

삼성은 2013년 380조 원 규모의 매출을 올렸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같은 해 대한민국의 명목 국내총생산(GDP)은 1428조 원이다.

해외 매출 비중이 훨씬 큰 삼성의 매출액은 GDP와 직접 비교하기 어렵지만, 삼성의 매출액이 대한민국 GDP의 26.6%나 차지한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삼성의 수출은 2013년 1572억 달러로 한국 전체 수출액 6171억 달러의 25%에 해당한다.

삼성그룹은 브랜드 파이낸스에서 선정하는 글로벌 브랜드가치순위 500대 기업에서 2018년 기준 4위에 올랐다. 브랜드 파이낸스는 매년 세계 기업의 브랜드가치를 평가하여 보고서를 작성, 브랜드가치 500대기업을 발표하고있는데, 브랜드 파이낸스는 2018년 삼성의 브랜드가치가 92289백만달러(약 104조원)의 가치를 지녔다고 평가했다.

2016년 기준으로 삼성그룹의 주요 계열사로는 크게 전자부문, 금융부문, 중공업·건설 부문, 서비스 부문 등 4개 분야로 나누어져 있다. 그리고 각 부문에 59개의 계열사가 포진해 있다.

삼성그룹은 2017년 5월 기준 상장기업 16개사, 비상장기업 44개사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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