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 김현수 화가
사진 = 김현수 화가

[데일리그리드=이준호 기자] 민화화가 김현수씨는 현재 경기도 안성시 사곡동에서 ‘김현수 전통민화 연구소’ 및 전통민화연구보존회를 운영하고 있다.

민화란 일반적으로 민속에 얽힌 관습적인 그림이나 오랜 역사를 통하여 사회의 요구에 따라 같은 주제를 되풀이해 그린 생활화를 말한다. 비전문적인 화가나 일반 대중들의 치졸한 작품 등을 일컫는 말로 쓰인다. 하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직업 화가인 도화서(圖畫署)의 화원(畫員)이나 화가로서의 재질과 소양을 갖춘 화공(畫工)이 그린 그림도 포함시켜 말하고 있다.

민화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일본인 야나기(柳宗悅)이다. 그는 “민중 속에서 태어나고 민중을 위해 그려지고 민중에 의해서 구입되는 그림”을 민화라고 정의했다. 그 뒤 우리 나라에서도 민화에 대한 연구와 논의가 활발해지면서 여러 학자들이 민화의 의미를 규명하고자 했다.

조자용(趙子庸)은 “서민·평민·상민·민중 등 사회 계층이나 신분의 구별 없이 도화서 화원은 물론 모든 한국 민족들이 그린 그림”이라 해석했다. 김호연(金鎬然)은 “민족의 미의식과 정감(情感)이 표현된 겨레의 그림인 민족화”, 이우환(李禹煥)은 “평민·서민의 습관화된 대중적인 그림”으로 정의했다.

이러한 여러 연구를 종합하면 민화는 엄밀한 의미의 순수, 소박한 회화와 함께 도화서 화풍의 생활화·실용화를 모두 가리킨다. 그리고 백성들이 오랜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 이 세상에서 복 받고 오래 살기를 바라는 벽사 진경(辟邪進慶)의 염원, 신앙과 생활 주변을 아름답게 꾸미고자 하는 마음을 솔직하고 자연스럽게 나타낸 전통 사회의 산물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민화가 사람들의 본능적인 회화의 의지와 욕구를 표출하며, 종교와 생활 풍습속에 얽힌 순수하고 친화적이며 대중적인 실용화라고 정의할 때, 민화는 우리 민족의 역사와 더불어 시작됐다고 생각된다. 신석기시대의 암벽화(巖壁畫), 청동기시대의 공예품, 삼국시대의 고분 벽화와 전(塼), 고려·조선 시대의 미술 공예품에 민화와 같은 그림과 무늬가 많다는 사실은 이를 뒷받침한다.

그중에서도 암벽화의 동물 그림, 고구려 벽화의 사신도(四神圖), 신선도, 해·구름·바위·산·영지(靈芝) 등의 장생도(長生圖), 수렵도, 백제의 산수문전(山水文塼)의 산수도 등은 한국민화의 연원을 밝힐 수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삼국유사'에 보이는 솔거(率居)가 황룡사 벽에 그린 단군(檀君)의 초상화는 분명히 민화적 소재이다. 특히 '처용설화 處容說話'에서 처용의 화상을 문설주에 붙이면 역신(疫神)이 들어오지 못할 것이라는 대목은 고대부터 벽사를 위한 그림을 대문에 붙였던 풍습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러한 풍습은 조선 말기까지도 금강신장·별성마마 그림을 붙이던 풍습으로 이어졌다.

이밖에도 이색(李穡)·이규경(李圭景) 등의 문집에 세화(歲畫)·십장생(十長生)·음산대렵(陰山大獵) 등 민화적 그림에 대한 기록과 아울러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 등에 보이는 세화와 도화서 화원들의 그림에 대한 기록을 볼 때, 한국의 민화는 우리 민족과 같이 존재해 왔다고 볼 수 있다.

민화의 작가는 도화서 화원과 화원의 제자에서부터 화원이 되지는 못하고 그림에 재주가 있어 사람들의 요구에 따라 그림을 그렸던 화공 그리고 일반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들은 대개 신분이나 사회적 지위가 낮은 사람들이었다.

기록에 나타나는 대로 도화서 화원의 절대수가 모자라 이런 화공들의 도움을 받았던 것으로 미루어도 수많은 한국 회화의 수요를 채운 사람들은 대단히 많았을 것이다. 그중에는 귀족·문인·승려·무당 중에서 재주 있는 사람이라든가, 시골 장터와 동네를 돌아다니며 낙화(烙畫)·혁필화(革筆畫) 등을 그리던 유랑 화가도 있었을 것이다.

민화의 수요자는 왕실·관공서로부터 무속(巫俗)·도교·불교·유교의 사당, 사찰·신당, 일반가정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회 단체와 여기에 소속된 대중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정사(正史)에 나오는 세화·의장도(儀仗圖)·의궤도(儀軌圖)·감계도(鑑戒圖)·경직도(耕織圖) 등과 한국 회화사의 주요 소재인 산수·화훼(花卉)·동물·초충(草蟲)·사군자·인물·풍속화와 같은 회화의 수요는 그림을 특별히 사랑했던 한국인들에게 매우 큰 것이었다.

무속·도교·불교·유교의 종교적 제례와 공공 기관 및 개인에게 사용된 그림은 공간을 미화하고 나아가 백성을 교화(敎化)하며, 그들의 풍속에 관계된 내용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도화서 화원이나 일류 화공의 수가 적었던 고대 사회에서는 이름 없는 화가와 비전문적인 아마추어 화가들에 의해 그 수요가 충족됐던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나쁜 귀신을 쫓고 경사스러운 일을 맞기를 바라는 대중의 의식과 풍습 속에 얽힌 그림, 집 안팎을 단장하기 위한 그림, 병풍·족자·벽화 같은 일상 생활과 직결된 그림이 민화의 주류를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민화는 주제에 의해 볼 때 다음과 같은 몇 가지의 큰 범주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종교적 민화와 비종교적 민화로 나눌 수 있다. 종교적 민화는 한국 고유의 종교이며 신앙인 무속과 도교적인 내용을 소재로 그린 그림, 불교적인 그림, 조상 숭배와 윤리 도덕의 교화를 강조한 유교적인 회화 들을 들 수 있다. 비종교적인 민화는 장식을 위한 민화라든지 풍속화·인물화·고사화(故事畫)·기록화와 산수화적 성격을 띤 지도·천문도 등이 있다.

안성에서 민화가 유행하던 시기는 19세기 말부터 해방이전까지로 특히 안성시 보개면 동문리 일대에는  가내수공업으로 투전(鬪牋)의 제조가 활발했다고 한다.

17세기 조선 숙종 때 역관(譯官)인 장현(張炫)이 중국의 노는 법을 고쳐 만든 것이라 하면서 팔목(八目)80장을 수투전(數鬪牋)이라 하고, 육목(六目)60장을 두타(頭打)라고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투전은 두꺼운 종이나 얇은 대쪽에 사람,새,짐승,곤충,물고기 따위를 그리거나 굴귀를 적어 1부터10까지의 끗수를 표시 했다고 한다.

김현수 화가는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후 안성지방 민화연구사업을 하고 있으며 현재 문화재청 제05-8호 한국전통무형문화재진흥재단 민화전수교육강사로 활동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김현수씨는 "옛 것의 소중함과 선조들의 지혜와 해학적 상징성을 가지고 바쁘고 지친 많은 사람들에게 힐링이 될 수 있도록 더 열심히 활동하며 정진 할 것"이라고 전했다.
 

이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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