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곡 경계

  선조 33년(1600) 선조는 이순신의 사당을 세우기 위해 영의정 이항복(李恒福)에게 남방을 순시하여 이순신의 공적을 밝히라는 명을 내렸다. 이에 이항복은 여수의 전라좌수영에 도착하여 여러 장수들과 ‘충성을 표창하고 덕업을 기념하기 위한 일[表忠紀德]’을 모의하였다. 그 결과 최초의 사당이 지어지고 사액이 내려졌는데, 이것이 바로 이순신의 최초 사당인 충민사(忠愍祠)이다. 이 명칭을 계기로 이때부터 이순신을 충민공(忠愍公)이라고도 칭했다.

  그후 현종 2년(1661) 남해군 노량에 있는 사당에 우암(尤菴) 송시열이 〈노량묘비(露梁廟碑)〉를 지었는데, “이순신은 크고 작은 수십 회의 전쟁에서 모두 온전히 승리하여 중흥의 위업에 기초를 이루었다.”고 평가하였다. 그후 2년 뒤에 충렬(忠烈)이라는 사액이 내려졌는데, 이 사당이 바로 지금의 충렬사이다. 연이어 지는 후대의 평가에 부응하여 정조(正祖)는 1792년 윤음(綸音)에서 “재건의 황은(皇恩)을 생각하고 이순신의 공업을 표창하고자 한다.”며, 이순신의 문집인 《이충무공전서》 간행을 명했다.

“요즘 《이충무유사(李忠武遺事)》를 읽으면 노량해전을 회상하게 되어 나도 모르게 다리를 어루만지며 길게 탄식을 하게 된다. 충무의 남긴 사적을 요즘 내각에 명하여 전서(全書)를 편찬하게 하였으니, 그것이 활자로 인쇄되거든 그 한 본을 이 충렬사(忠烈祠)에 간직해두면서 제사지내도록 하라.” - 《교감완역 난중일기》해제-

이순신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가졌던 정조는 “이번 일은 충의(忠義)를 높이고 공로에 보답하며 무용(武勇)을 드러내고 공적을 표창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라고 하였다.(《정조실록》19年(1795) 9월14일자)  이순신의 난중일기, 장계 등의 유고(遺稿)와 관련문헌 정리 작업이 이때에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그후 《이충무공전서》 는 구두점 등을 보완하여 수차례 속간되었다.

  그후 1930년대 일본인에 의해 간행되기도 했는데, 특히 이때 내용의 일부가 수정되었다. 이순신이 왜군을 뜻하는 의미로 쓴 ‘도적 적(賊)’자가 삭제된 것이다. 1935년에 조선사편수회에서 간행한 《난중일기초》 내용에서도 일본인에 의한 왜곡과 오독이 상당수 발견되었다. 예로 “일맥금전(一脈金錢)”, “스물입(卄)”, “서른삽(卅)” 등의 글자는 일본인의 대표적인 오독 사례이다. 근래에는 이순신의 자살설과 은둔설 등 전혀 근거 없는 낭설이 아직도 존재한다. 이 모두 사실과 다른 것이므로 이를 인용하는 것은 반드시 경계해야 한다.

  중국 6조시대 유협(劉勰)의 《문심조룡(文心雕龍)》을 보면, “먼 시대의 것을 추적하여 전술하는 데는 시대가 멀수록 허위가 많아진다.”고 하였다. 역사는 정확한 사실을 중시하는데 불리한 내용이라고 해서 임의로 삭제해서도 안되고 관심을 받기 위해 왜곡을 해도 안될 것이다. 세상의 유행은 기괴한 내용들을 좋아하고 천착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것이 결코 진실이 될 수 없다. 이순신은 우리 역사에서 상징적인 인물로 자리 매김한 지 오래니, 우리는 항상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그분의 충렬(忠烈) 정신이 후대에 올바르게 전해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글 : 노승석 여해고전연구소장(이순신연구가, 초서/고전전문가)

《교감완역 난중일기》 개정2판(여해 2019)

《난중일기 유적편》(여해 2019)

노승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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