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이 좋아야 끝맺음도 좋다

노승석 이순신 전문연구가(증보교감완역 난중일기 저자)

 어떤 일이든 처음에 계획을 세우기는 쉬우나 끝을 맺기는 어렵다. 효율적인 성과를 위해서는 먼저 끝을 맺을 수 있는 지부터 가늠해보고 착수하는 것이 중요하다. 시작이 반이란 말도 있다. 물론 강한 열정을 갖고 시작부터 하고 보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공자는 “처음을 신중히 하지 않으면 나중을 후회한다[不愼其初, 而悔其後].”고 말하였다(『공자가어』「육본」). 첫 단추를 잘못 꿰면 나머지도 따라서 잘못되므로 처음을 신중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처음 시작할 때의 먹은 마음을 초심(初心)이라고 한다. 이 초심을 갖고 끝까지 일을 관철시키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공자는 “나의 도는 하나로 관철되어 있다[吾道一以貫之].”고 하였다(『논어』「이인」). 그 하나란 절대 불멸의 진리로서 인(仁)을 말한다. 공자는 한 평생 변함없이 인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공자가 위대한 성인이 된 것도 한결같은 마음으로 학문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강태공은 “한 사람이 두 마음을 가지면 그 내부가 반드시 쇠망한다[一人兩心, 其中必衰].”고 하였다(『육도』「문벌」). 어떤 조직이든 사람이 두 마음을 가진다면, 구성원들이 서로 이반하여 조직이반드시 와해될 것이다.

  이순신은 평소에 강직한 선비정신으로 생활하였고, 전쟁 중에는 항상 유비무환의 정신으로 전쟁을 대비했다. 국가와 민족의 안녕을 위해 하루속히 난리를 평정해야한다는 생각에, 전쟁의 임무를 조금도 소홀하지 않았다. 그는 한산대첩을 이룬 후 왜군의 침입에 대한 해상경계를 강화하기 위해 1593년 7월 진영을 여수에서 한산도로 옮겼다. 그 다음날(16일) 인척인 현덕승(玄德升)에게 편지를 보내며 자신의 생각을 전했다.

  난리 중에도 옛 정의를 잊지 않고 멀리서 위문편지와 함께 각종 물품을 보내시니, 모두 진중의 진귀한 물건으로 매우 감사합니다. 잘 모르겠지만 어느 날에야 전쟁을 끝마치고 평소 종유(從遊)하던 회포를 실컷 풀 수 있겠습니까. 편지를 쓰려하니 슬픈 마음만이 간절할 뿐입니다. - 서간첩에서 -

이순신은 전쟁 중에도 옛정을 잊지 않고 보내준 현덕승의 성의가 고마웠다. 예전처럼 전쟁 없는 평온한 때에 만나서 회포를 풀고 싶은 심정을 적었는데, 그 이면에는 태평한 시대를 바라는 염원이 간절히 담겨있다. 그에게는 감내하기 어려운 전쟁으로 인간관계를 자유롭게 가질 수 없는 현실이 매우 개탄스러웠다.

  1598년 겨울 왜적들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무사히 일본으로 귀환할 수 있도록 구출작전을 벌였다. 그때 일본 살마주(薩摩州)의 군대인 사천의 왜군을 비롯하여 곤양(昆陽)과 사천(泗川)의 왜군들이 노량(露梁)으로 총집결하였다. 11월 18일 삼경(三更)에 이순신은 배 위에서 무릎을 꿇고 하늘에 기도하였다.

         “이 원수를 제거할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此讎若除, 死亦無憾)”

이윽고 이순신은 노량 관음포(觀音浦)에서 적과 교전하여 왜선 2백 여척을 분멸하는 전공을 세웠다. 남해 경계까지 추격하여 직접 화살과 포탄을 무릅쓰고 독전하다가 결국은 날아온 탄환을 맞았다. 이때 그는 “전쟁이 한창 다급하니 나의 죽음을 말하지 말라.”고 말하고는 세상을 마쳤다.

   이순신은 마지막 최후까지 장수로서의 책임을 다하고자 화살과 탄환을 무릅쓰고 격전을 벌이며 왜적을 섬멸하는데 만전을 기했다. 자신의 한 몸을 바쳐서라도 난리를 평정해야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그는 임란 초기부터 최후의 죽음을 맞기까지 40여 해전을 오직 유사무이(惟死無貳, 죽음만이 있고 다른 건 없다)한 자세로 임하였다. 이러한 한결같은 초심이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정신으로 승화되어 그는 청사(靑史)에 길이 빛나게 되었다. 이러한 업적을 이룬 이순신의 정신이야말로, 오늘날 이기주의가 팽배해진 현대사회에서 진정한 인(仁)의 정신을 보여주는 시금석이라 하겠다.

     대표저서

     증보교감완역 난중일기(여해, 2014) 이순신의 리더십(여해, 2014)

 

노승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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