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년대비 26%성장, 국내서도 ‘아트테크’ 바람

지난해 세계 미술품 시장 거래액은 미국 증시 활황세를 타고 재력 있는 수집가들이 전후 예술가들의 현대 작품 가격을 대폭 끌어올린데 영향 받아 사상 최고를 기록한 가운데, 국내외 큰 미술품장터(아트페어)들이 잇따라 판을 치며 성장을 지속하고 있다. 미니멈은 있어도 맥시멈은 없다는 미술품의 세계, 그 시장이 궁금하다.

지난 한 해 동안 세계 미술품 시장이 급성장 했다. 최근 네덜란드 마스티리히트 소재 ‘유럽 순수미술재단’은 연례보고서를 통해 “2014년 세계 시장의 미술품과 골동품 총 판매액이 512억유로(약 61조2천억원)에 달해 2013년의 474억유로에 비해 7%가 증가했다”고 밝혔다.

지난해 세계 미술품시장 판매액이 금융위기가 터지기 이전 2007년의 기록적 판매액 480억유로를 넘어선 것이다. 이는 금융위기로 미술품 가격이 폭락한 2009년의 판매액 283억유로에 비하면 81%가 증가했다. 

지난해 순수미술품 시장에서 판매액이 가장 큰 부문은 전후 현대 미술가 작품으로 전체 판매액의 48%를 차지했다. 보고서는 증시 호황으로 재산이 늘어난 부자들이 유망한 젊은 미술가 작품을 사들이는 등 수집 작품을 다양화했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100만유로 이상 가격으로 팔린 작품은 1천530점으로 2013년에 비해 17%나 늘어났다.

미국은 지난해 세계 미술품 거래액의 38.8%(2013년 38%)를 차지해 미술품 시장 선두위치를 고수했다. 2위를 지킨 중국은 세계 미술품 거래 점유율이 2013년 24%에서 지난해에는 22.4%로 다소 감소했다. 영국은 2013년 20%에서 작년에는 21.9%로 소폭 늘어났다.

작품별로 보자면 폴 고갱의 1892년 작 ‘언제 결혼하니?’가 개인 거래를 통해 3억달러(약3,272억원)에 팔리며 세계 최고가 그림 타이틀을 경신했다. 종전 기록은 비슷한 시기에 그려진 폴 세잔의 ‘카드 놀이하는 사람들’로, 2011년 역시 개인 거래를 통해 2억5000만달러(약 2,760억원)에 판매된 바 있다. 두 그림 모두 미술품에 대한 공격적 투자를 아끼지 않는 카타르 왕가가 매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글로벌 ‘기록경신’
1차 시장은 물론, 가격이 공시되는 2차 시장에서도 기록 경신이 이어졌다. 런던에서 열린 소더비(Sotheby‘s)의 현대미술 이브닝 경매에서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추상화 작품이 4,630만달러(약 513억6,500만원)에 팔리며 작가 개인의 종전 최고가 기록을 경신했다.

지난 2013년 3,712만달러(약 410억원)에 팔렸던 리히터의 ‘대성당 광장, 밀라노’보다 우리 돈으로 100억원 가량 많은 액수이다. 리히터는 제프 쿤스, 데미안 허스트와 함께 세계 미술시장에서 가장 비싸게 그림이 거래되는 생존 작가 중 한 명이다.
 
이처럼 미술품 시장의 가치가 치솟고 있는 이유는 바로 글로벌 경기둔화가 장기화되면서 미술시장이 새로운 투자처로 각광받고 있는 것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갈 곳 잃은 뭉칫돈이 부동산과 주식시장 대신 미술시장으로 몰리고 있다. 그림이 안전자산이라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미술품에 대한 수요가 점점 늘어나고 있기도 하다.

즉 부동산이나 주식 위주의 투자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이른바 ‘아트테크(아트+재테크)’를 실현하는 움직임이 활발해지며 세계적으로 얼어붙었던 미술품 경매시장이 활기를 띠고 있는 것. 이런 미술품 바람은 국내서도 순풍하고 있다.

지난 1월 서울옥션 강남점에서 열린 올해 첫 경매 ‘2015 마이 퍼스트 컬렉션(My first collection)’에는 경매에 참여하기 위한 인파로 북적였다. 경매사 측에서 마련한 200여석의 자리가 부족해 경매장 뒤편에 서서 응찰표를 드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관계자는 지난해보다 참가자가 두 배 가량 늘어난 것으로 관측했다. 경매에 대한 관심은 곧 결과로 나타났는데 156개 작품이 출품된 이번 경매에서는 낙찰률 77%(120건), 낙찰총액 13억6,000만원을 기록했다.

작품은 지난해에 이어 단색화 작품이 인기를 끌었다. 박서보, 윤형근, 정상화 등 한국 단색화 작가들의 작품은 대부분 경합 끝에 낙찰되며 그 인기를 입증했다. 이러한 열기는 정창섭, 권영우, 이동엽 등으로 이어지며 단색화 작가군이 확대되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이번 경매에 출품된 단색화 작품 17점이 모두 낙찰됐고, 가장 경합이 치열했던 작품 역시 단색화인 박서보의 ‘묘법 No.25-75’이었다. 시작 가 1,300만원부터 시작해 100만원씩 호가, 시작가의 4배가 넘는 5,500만원에 낙찰됐다.

한국의 단색화 작품 인기는 사실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지난해부터 홍콩을 중심으로 해외 고객들의 한국 단색화 앓이가 시작된 것. 덕분에 아시아미술시장에서 한국미술과 한국 큰손컬렉터들의 비중이 점점 높아지고 있어 한국출신 스페셜리스트들이 늘고 있는 추세다.

실제로 최근 홍콩 소더비 전시장에 걸린 박서보, 이우환, 하종현, 정상화 등 단색화 작품과 김창열, 김환기 등의 33점이 날개 달린 듯 팔렸다는 후문이다. 특히 박서보의 묘법시리즈는 인기여서 20호 크기가 3억원 선에 판매되기도 했다.

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미술품 경매에는 1만3,822점이 출품, 8,828점이 낙찰되어 낙찰율은 63.9% 기록했다. 낙찰총액은 970억7,300만원으로 2013년(720억700만원)보다 34.8% 상승했다. 미술 경매시장의 ‘황금기’라고 불리는 2008년(1,155억원) 이후 가장 많은 액수를 기록한 것이다. 이는 서울옥션을 비롯해 K옥션, 아이옥션 등 국내 미술품 경매사 8곳에서 벌인 85회의 경매 실적을 합한 결과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아이러니
이번 ‘2015 마이 퍼스트 컬렉션’에서 가장 화두가 된 작품은 검찰이 전두환 전 대통령 일가로부터 압류한 미술품 경매였다. 전 전 대통령 일가에서 나온 미술작품 64점이 경매시장에 나오며 미술품 애호가뿐 아니라 일반 대중의 눈길을 끌었다.

전 재산이 29만원뿐이라던 전두환 전 대통령 일가의 검찰이 압류한 미술품을 경매한 결과 낙찰된 총 금액은 72억8,194만원이다.

그의 일가에서 나온 미술작품은 총 64점. 지난해 3월까지 6차례에 걸쳐 진행된 경매에서 최고가는 이대원 화백의 ‘농원’으로 6억6,000만원에 낙찰되었고, 추정 가 150만~400만원에 나온 ‘충효명예 인내군자도’, ‘천상운집’, ‘휘호’ 등 전 전 대통령의 글씨 3점은 모두 추정 가를 훌쩍 뛰어넘은 500만원대에 팔렸다. 이 돈은 경매수수료를 제외하고 전액 국고로 환수된다.

이를 두고 미술과 경매업계에선 전 전 대통령의 경매로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뒀다고 평가한다. 전 전 대통령 일가의 컬렉션이 경매시장에 나온 과정은 좋지 않았지만 이를 계기로 일반인들의 미술품에 대한 관심이 커졌을 뿐 아니라 국고 환수를 목적으로 했지만 결과적으로 미술 경매시장에도 온기를 불어넣었다는 것이다.

컬렉션의 낙찰총액 기준으로 작가를 살펴보면 김환기가 100억7,700만원으로 1위를 차지했다. 그 뒤로 이우환(87억6,300만원), 김창열(34억5,800만원), 오치균(29억2,700만원) 등이 이었다.

지난 2013년 쿠사마야요이(일본), 로이 리히텐슈타인(미국)이 1, 2위를 차지했던 것과 비교했을 때 국내 작가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국내 유명 작가들의 일부 작품이 초 고가에 거래된 가운데, 해외 작가들의 에디션은 상대적으로 가격이 낮으면서도 안전한 투자처로 꼽혔다. ‘마이 퍼스트 컬렉션’에 출품된 16점의 해외 작가 작품 가운데 13점이 낙찰된 것만 봐도 그렇다. 최고가는 7,000만원에 낙찰된 앤디 워홀의 ‘달러사인’이었고,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판화는 3,200만원, 키스 해링의 판화 역시 1,300만원에 낙찰됐다.

팝아트의 인기도 주목할 만하다. 지난해 미술 시장의 성장률을 봤을 때 팝아트가 가장 높은 가격 상승률을 보인 것이 이를 방증한다. 이번 한국 컬렉션에서도 팝아트가 유독 눈에 띄었다. 미술품 경매가 일부 특권층이 아닌 일반 대중에 다가간 것도 고무적이다. 미술품 경매 업체들은 대중의 눈높이에 맞추기 위해 중저가 미술품 위주의 경매와 온라인 경매를 확대하고 있다.

온라인 경매도 대중의 벽을 허무는 역할을 하고 있다. 온라인 경매는 회원가입만 하면 응찰 자격이 주어지고, 현장을 방문하지 않아도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초보 컬렉터나 젊은 층이 선호하는 방식이다. 다양한 가격대의 작품이 출품돼 선택의 폭도 다양하다. 세계 미술 경매시장을 이끄는 소더비와 크리스티는 지난해 초부터 온라인 경매 비즈니스를 강화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서울옥션과 K옥션이 온라인 경매를 진행하고 있다. 2006년부터 온라인 경매를 시작한 K옥션은 지난해 28억5,443만원의 실적을 올리며 자체 최고치를 기록했다. 지난해 온라인 경매를 시작한 서울옥션 역시 22억7,421만원의 판매고를 올렸다. 기존 오프라인 경매가 구매력이 큰 50~60대에 한정된 반면 중저가 작품이 많은 온라인 경매에는 20~40대의 젊은 컬렉터의 참여가 높다는 게 업계 측의 설명이다.

화랑, 경매사 ‘잡음’
하지만 급성장 뒤에는 당연히 부작용도 존재한다. 경매사의 지나친 독점으로 화랑과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는 것. 일각에서는 경매사가 신진 작가 시장까지 넘보게 되며 화랑의 고객을 뺏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전문가들은 미술품 경매시장도 당연히 필요하지만 투자 열기가 과열되고, 화랑이 해야 할 1차적 시장 기능과 충돌한다면 문제가 있다는 의견이다.

미술품 경매가 늘어나며 미술시장하면 옥션이라는 인식이 생겨나 화랑이 설자리를 잃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미술시장은 개인전을 통해 작가의 작품을 고객에게 소개하는 1차 시장인 화랑과 한번 거래된 ‘중고 미술품’을 거래하는 2차 시장 옥션으로 구분된다. 옥션의 공격 경영으로 경계가 흐려지고 화랑 영역이 침범당하면서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미술업계는 연간 경매 횟수 제한, 제작시기 5년 이내 작품 경매 제한 등 다양한 방안을 통해 상생할 수 있는 방법을 마련 중이다.

윤희선 기자
저작권자 © 데일리그리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