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민관의 역할

    자고로 문치주의가 번성한 시대일수록 항상 백성과의 소통이 잘 되었다. 위정자가 백성들과 함께 즐거움을 누린다면 백성들이 따르는 것은 물이 아래로 흐르는 이치와 같은 것이다. “인간의 도는 정치에 민감하게 나타난다.[人道敏政]”고 했으니, 정치를 잘 해야 민생이 안정됨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 점에서 위정자는 항상 민의를 잘 살펴야 한다. 공자가 “백성들이 이롭게 여기는 것을 따라 이롭게 한다면 이것이 은혜를 베풀되 낭비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말은 예나 지금이나 위정자가 항상 본받아야 할 명언이다.

   민심은 천심이라고 하였다. 많은 백성들의 공론은 위정에 지침이 되기도 한다. 때문에 위정자는 선한 교화로써 민심을 얻어 민심이 이반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중국 주(周)나라 소공(召公) 석(奭)이 남국(南國)을 순행하면서 선정을 베풀자, 그에 감격한 백성들은 그가 일찍이 머물던 아가위 나무를 소중히 여겼다고 한다. 이를 “아가위 나무의 사랑[甘棠之愛]”라고 한다. 후대에는 위정자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떠난 뒤의 그리워하는 비석인 “거사비(去思碑)”, 선정을 잊지 못하는 “불망비(不忘碑)”등이 있다.

   충무공 이순신도 순국한 이후 부하와 백성들에게 잊지 못할 인물로 기억되어 그의 덕을 추모하는 불망비가 세워졌다. 1603년에 이순신 장군 막하에 있던 수군병사들이 장군의 덕을 추모하기 위해 “타루비(墮淚碑)”를 세운 것이다. 이는 중국 진(晉)나라 양양(襄陽)지방 백성들이 양호(羊祜)가 태수로 있을 때 베푼 선정을 생각하면 반드시 눈물을 흘린다는 고사에서 인용한 것이다. 또한 1739년 통제사 조경(趙儆)이 한산도에 세운 “제승당유허비”가 있다. 이는 이순신이 머문 제승당의 터를 알리고 백성들이 오랜 세월동안 그의 업적을 잊지 못하여 세운 것이다.

  이처럼 이순신이 사후에도 부하와 백성들이 오래 기억하는 것은 전쟁을 지휘하는 장수가 민정도 잘 살폈기 때문이다. 손무는 “용병술을 아는 장수는 백성의 운명을 책임지고 국가의 안위에 주도자가 된다.”고 하였다. 이순신은 전쟁 중에 백성을 괴롭히는 관리와 탐관오리 등을 엄격히 단속하였다. 병신년 어느 날 흥양현감이 와서 관리들이 백성을 침해하는 사건을 보고하자, 바로 관련자들을 체포하도록 하였다. 얼마 후 전남 순천의 백성들이 소고기와 술을 차려놓고 이순신을 초청했지만, 매번 사양하였다. 정유년 6월 2일 경남 산청을 지날 때 백성들이 밥을 지어 내왔으나 이순신은 종들에게 얻어먹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그러나 이튿날 종들은 밥을 얻어먹었다. 이 사실을 안 이순신은 종들을 매질하고 쌀을 도로 갚아주게 하였다. 전쟁에 시달리는 백성에게 얻어먹는 것만으로도 폐를 끼치는 일로 여겼기 때문에 그와 같이 한 것이다.

  전쟁 중의 백성들은 이순신을 삶의 희망을 주는 존재로 여겼다. 이순신이 정유재란 당시 억울한 누명으로 삼도수군통제사직에서 파직되었다가 다시 복직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전라지역의 피난민들은 그를 보고 울부짖으며 “나으리께서 다시 오셨으니 이제는 우리가 살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순신이 전쟁 중에도 백성을 남다른 관심과 사랑으로 돌봐주자, 백성들도 더욱 그를 믿고 따랐다. 명량해전 당시 수백척의 피난선에 승선한 백성들은 이순신의 수군부대를 후방에서 지원하는 역할도 하였다.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백성들도 목숨을 걸고 이순신을 도왔다. 이는 백성들이 모두 장수로서 목민관의 역할도 다할줄 아는 이순신의 감화력에 감복한 결과, 끝내 정의를 실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글 : 노승석 이순신 전문연구가 (교감완역 난중일기 저자)

노승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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