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儒學)의 필요성

인간사회에서 인간의 도리에 대한 추구는 예나 지금이나 항상 중요하게 인식되어 왔다. 그때마다 유학(儒學)이 올바른 가치관을 형성하는데 절대적인 기준이 되었다. 바로 유학에서 제시하는 덕목이 인성교육의 근본이 되기 때문이다. 옛 선현들은 항상 인격수양을 통해 심성을 길렀는데, 역사적인 인물들이 위대한 이유는 이런 바탕 위에서 소양을 쌓고 이상적인 도덕을 실천했기 때문이다. 

이순신이 훌륭한 인물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유학을 배웠기 때문이다. 유성룡은 이순신에 대해서 “말과 웃음이 적고 용모가 단정하여 근신하는 선비와 같았다.”고 하였다. 그는 무과출신의 장수였지만, 본래는 문인의 소양을 쌓은 선비였던 것이다. 이러한 유교적 바탕이 있었기 때문에 평소에 항상 자신을 근신하며 절제하는 생활을 한 것이다. 

인간이 지켜야 할 윤리 덕목에는 오덕(五德, 仁義禮智信)이 있다. 여기서 가장 으뜸이 되는 인(仁)은 바로 효(孝)에서 시작한다. 공자(孔子)는 “효는 덕의 시작이다.”라고 하였다(《공자가어》〈제자행〉). 또 “군자가 어버이를 섬기는 데 효도하므로 그것을 임금에게 충성으로 옮길 수 있다[君子之事親孝, 故忠可移於君].”고 하였다(『효경』「광양명」). 부모에게 효도하는 이는 나라에도 충성할 수 있는 것이다. 진정한 효의 실천이 나라사랑을 이루고 끝내 인간사랑의 정신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이순신이 이루어낸 효란, 한마디로 인(仁)을 실현한 결정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전쟁 중에도 항상 어머니에 대한 자식의 도리를 다하고자 하였다. 78세 된 늙으신 홀어머니를 천지(天只)라고 말하며 늘 그리워한 것은 자신에게 있어서 하늘과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쟁 중에도 수시로 사자(使者)를 보내어 대신 문안을 드렸다. 어머니 생신 때는 전쟁으로 헌수(獻壽, 장수 비는 술)를 올리지 못한 것이 평생의 한이 된다고 하였다. 전쟁으로 늘 불안했던 이순신은 마침내 어머니를 여수 본영과 가까운 고음천의 송현(松峴) 마을로 모셔와 수시로 문안인사를 드렸다. 이것이 이순신의 인간다운 모습이다. 

이순신은 항상 해상 전투임무에 주력하면서도 백성을 안정시키는 일을 급선무로 여겼다. 백성이 불안하면 국가의 기반이 위태로워지기 때문이다. 병신년(1596) 2월 흥양현감 배흥립의 백성을 침해한 사건 보고를 받고 가해자들을 엄벌하였다. 또한 전쟁으로 황폐화된 전남 광양지역 백성들의 군역을 면제하여 그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었다. 이처럼 전쟁하는 와중에도, 항상 민초(民草)들의 고통을 덜어주고자 한 것이다.

이순신은 어버이에게는 극진한 효자였고, 나라에는 헌신한 충신이었으며, 백성들에게는 어진 목민관이었다. 어떤 경우든 항상 자신의 도리를 다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임했던 것이었다. 유학의 선비 유(儒)자에는 본래 부드러울 유(柔)자와 젖을 유(濡)자의 뜻이 있다. 어진 이가 부드럽게 마음을 적셔주듯이 남을 감화하는 것이다. 이순신에게는 남다른 감화력이 있었다. 그 결과 일상에서는 주변인들에게 신망을 얻었고, 전쟁에서는 막강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어떠한 위기상황에도 항상 최선을 다한 자세는 바로 그의 내면에 충전된 유학의 정신에서 비롯한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그를 유학의 근본인 인(仁)을 실현한 인물로 길이 기억한다.                

글: 노승석 이순신 전문연구가(증보 교감완역 난중일기 저자)

 

노승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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