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역사

   우리는 요즘 21세기 첨단정보화시대에 살면서 다양한 정보매체를 통해 많은 지식을 접하고 있다. 그렇다보니 아무리 오래된 역사일지라도 관심만 기울인다면 얼마든지 그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물론 역사란 시대적인 상황에 따라 간혹 가려질 수는 있어도 기록으로 남은 역사적 사실마저 속일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연구자는 항상 춘추필법의 공정성을 생각하며 술이부작(述而不作)의 자세로 신중을 기해야 한다. 이에 필자는 여기서 한 가지 새로운 사실을 말하고자 한다.

   이순신의《난중일기》는 이미 오래전부터 지식인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활자본《난중일기》가 간행되기 전 1693년(숙종 19) 이후쯤《난중일기》가 3자에 의해 초록된 것이다. 이 책이 바로《충무공유사》라는 책이다. 이 안의〈일기초〉에는 새로운 을미일기를 포함한 32일치의 일기가 들어 있다. 이 책은 1967년 ‘재조번방지초’라는 이름으로 영인되었는데, 원문상태가 매우 희미하여 읽기조차 어려울 정도였다. 2007년 필자는 이 책의 원본을 토대로 판독하였고, 그때 표지에 초서로 적힌 ‘충무공유사’라는 제목글씨를 새로 해독하여 기존의 잘못된 제목이름을 바로잡았다.

   2008년《충무공유사》전편을 완역한 결과내용을 조선일보에 단독으로 발표하였고, 이 책에 대한 선행 연구자도 언급했다. 그런데 얼마 후 이 책의 일부나마 최초로 발굴한 분이 따로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바로《충무공유사》의 존재를 사진으로 처음 소개한 분이 바로 설의식(薛義植)이었던 것이다. 그는 1953년 한글본 난중일기인《이순신수록(李舜臣手錄) 난중일기초(亂中日記抄)》(수도문화사)를 간행하면서〈일기초〉에 들어 있는《무술일기》초고 사진 1장을 도판(圖版)으로 처음 소개하였다. 이 책의 주(註)를 보면, “조선사편수회 간행본에는 무술년 11월 8일부터 17일까지의 초고는 없다고 단언했으나 편자가 본 바에는 확실히 있다. 권두에 게재한 도판이 그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를 확인한 결과 역시 이 사진은 《충무공유사》원본내용과 일치했다.

   이 이후 1960년 4월 이은상은《이충무공난중일기》를 간행하면서 설의식이 소개한 내용을 인용 수록하였다. 이 책의 서문에, “10월 7일 이후 11월 17일까지의 친필 일기초 2면이 부철(附綴)되어 있는 것을 첨가하였다.”고 하였다. 그후 이은상은 다시《난중일기》번역본을 간행할 때 “최후 10일 동안의 일기(무술 11월 8일∼17일) 한 장이 붙어 있다.”고 기록하였다. 이은상이 기존《난중일기》에 없는〈일기초〉의 무술일기 내용을 번역문에 보유(補遺)하여 소개한 것이다. 설의식이 처음 소개한 것이〈일기초〉사진 1장이지만 이은상이 보완하여 발전시킨 것이다. 그간 이러한 사실을 어떠한 연구자도 밝히지 못했는데, 필자는 뒤늦게나마 학술지 논문을 통해 상세히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세인들이 아직도 모르고 있는 것이 유감이다.

   위의 두 사례를 통해 설의식과 이은상은 남다른 선견지명이 있었음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비록 이 분들의 선행업적이 가려졌었지만, 연구자로서는 당연히 바르게 밝혀야 한다. 이러한 점들을 보면 이순신에 대해 연구해야할 일들이 참으로 많다. 요즘 일각에서는 이순신에 대한 역사를 왜곡하고 난중일기를 사칭하여 낭설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이러한 현실에서 이순신에 대한 정론을 세우는 일이 갈수록 어렵게만 느껴진다. 그러함에도 우리는 이순신에 대한 세심한 관심으로 그분의 역사를 지켜야 한다. 올바른 역사의식으로 위인의 업적을 전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글 : 노승석 이순신 전문연구가(증보교감완역 난중일기 저자)

노승석
저작권자 © 데일리그리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