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1593년 1월 명나라는 벽제관 전투에서 패배한 후 일본과 강화하기 시작하고 심유경(沈惟敬)을 일본에 파견하는 등 전쟁에 소극적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왜군에게 남하하라고 지시했는데 남쪽에서는 왜군의 침탈이 여전히 자행되었다. 이때 이순신은 원균과 이억기와 2차 견내량 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는데, 특히 한산도에서 결사적으로 협심공격하기를 맹세하였다. 이를 계기로 7월에 여수에서 진영을 한산도로 옮기고, 8월에는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되었다.

그후 명나라 장수 이여송과 송응창이 요동으로 돌아가고 왜군이 철수함에 따라 선조는 한양으로 입성하였다. 결국 명나라는 일본과 화해할 것을 결정하는데, 선유도사(宣諭都司) 담종인(譚宗仁)은 왜군의 꾀임에 빠져 왜군을 치지 말라고 이순신에게 금토패문(禁討牌文)을 보내왔다. 이에 이순신은 “지금의 강화라는 것은 실로 거짓된 것입니다. 대인께서는 이러한 뜻을 두루 이해하여 역천(逆天)과 순천(順天)의 도리를 알도록 해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이때 이순신은 전염병에 걸려 눕기조차 불편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루도 병상에 눕지 않고 평소처럼 업무를 보았다.

1594년 명나라와 일본간의 본격적인 강화교섭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조선은 강화에는 뜻이 없었고 여전히 조선 땅을 수복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이때 몇 차례의 국지전을 벌였으나 별다른 전공을 세우지 못하고, 끝내 전쟁의 침체기를 맞게 된다. 국내 상황은 전염병과 기근으로 인한 사망자가 속출하고 절도사건이 빈발하였다. 이러한 참담한 현실 속에서 앞날에 대한 불안감은 더욱 고조되어 갔다.

이에 이순신은 앞날의 예견을 하기 위해 갑오년 7월부터 척자점(擲字占, 주역점을 간편화한 윷점)을 치기 시작하였다. 국가의 중대한 전쟁을 수행하는데 점을 친다는 것이 쉽게 이해되지 않을 수가 있다. 하지만 유학을 공부한 사람이 주역점을 치는 일은 일상에서 자연스러운 일이다. 셋째 아들 면(葂)의 질병, 유성룡 질병, 농사, 아내의 질병, 장문포해전 등에 대해서 점을 통해 예견했다. 이는 우주의 현상 속에서 인간사를 예견하고자 하는 치성의 모습이다.

임진왜란 중 병신년(1596) 하반기는 조선에 또다시 전운이 감돌고 이순신에게도 비운을 암시하는 시기였다. 이해 9월 일본 오사카성에서 열린 명나라와 일본의 강화협상은 일본의 무리한 요구로 결렬되었고, 일본에 다녀온 통신사 황신(黃愼)과 박홍장(朴弘長)이 히데요시의 재침의사가 담긴 비밀서장을 가져왔다. 마침내 12월 고니시유키나가는 부산에 침입하고 정유년 1월 가토 기요마사는 다대포에 상륙하여 정유재란이 발생하게 되었다. 

병신년의 병신(丙申)은《주역》으로 풀면 본괘가 화천대유(火天大有 ䷍)괘이고 상구(上九)가 동(動)한다. 화천대유는 이화(離火☲)가 건금(乾金 ☰)위에 있어 해가 하늘에 떠있어서 천하를 밝게 비추는 상이다. 군자는 이를 인용하여 선을 권하고 악을 징계함으로써 천명에 순응한다. 즉 권선징악이 순천(順天)하는 길이다.(주희,《주역본의》) 따라서 전쟁 중에 병신의 의미는 정의로운 전쟁을 하는 자는 승리할 것이지만 불의의 전쟁을 하는 자는 망한다는 풀이가 된다. 화천대유의 상구는 “하늘이 도우니 길하여 이롭지 않음이 없다”고 하였다. 《계사전》에 “신의를 생각하고 순천을 생각하여 어진 이를 숭상하면 하늘이 돕는다.”고 하였다. 이순신이 정유재란을 맞아 파직을 당해 백의종군하게 된 참담한 상황에서도 천리에 순응하는 자세로 부하들을 신의로써 지휘하고 유능한 참모들을 예우했기 때문에 무너진 수군을 재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글 : 노승석 이순신 전문연구가(증보교감완역 난중일기 저자)

노승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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