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필원본에서 교감완역본까지

   이순신은 무과출신의 장수이지만, 본래는 정통 유학(儒學)을 업으로 하는 유가에서 태어나 유학을 독실이 배운 전형적인 선비출신였다. 그가 임진왜란 중에 《난중일기》를 쓰게 된 것도 그러한 문인적인 소양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더욱이 초서(草書)로 일기를 작성한다는 것은 일반 장수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난중일기》를 보면, 그 당시에 유행했던 문서에 관한 용어들이 자주 보인다. 특히 힘있고 거침없이 흘려 써내려간 필치에서 이순신의 남다른 문필력을 엿볼 수 있다.

  임진왜란 중 7년 동안 작성된 《난중일기》에는 그날 그날의 날짜와 날씨는 물론, 그 당시 이순신이 보고 들은 진중(陣中)의 사실들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본래 《난중일기》이란 명칭은 정조(正祖) 때 초고본을 해독하여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를 간행할 당시 편찬자인 규장각 문신 윤행임(尹行恁)과 검서관 유득공(柳得恭)에 의해 붙여진 것이다. 실제는 연도별《임진일기》,《계사일기》,《갑오일기》,《을미일기》,《병신일기》,《정유일기》,《무술일기》란 이름으로 분책되어 있다.

  친필 초고본은 전편이 초서로 작성되어 있는데, 이순신이 평소에 주로 사용한 서체이기도 하다. 일기에는 긴박한 상황에서 심하게 흘려 적은 글씨들과 삭제와 수정을 반복한 흔적이 자주 보인다. 후대의 활자본에는 이 부분에 해당하는 글자들이 대부분 오독되거나 미상으로 남게 되었다. 특히《임진일기》와《계사일기》,《정유일기》에서 그러한 현상이 두드러지는데, 해당 일기를 작성한 해에는 유난히 치열한 전쟁이 있었다. 임진년에는 전쟁이 시작되어 옥포․당포․한산도․부산포 해전을, 계사년에는 웅포․견내량 해전을, 정유년에는 정유재란과 칠천량․명량 등의 해전을 치렀다.

   초고본을 옮겨 적은 전사본(傳寫本)은 비록 적은 분량이지만 《충무공유사》의〈일기초〉가 유일하다. 이는 1693년(숙종 19) 이후 미상인에 의해 전사(傳寫)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새로운 일기 32일치를 포함하여 총 325일치의 분량이 들어있다. 이에 대한 연구는 1953년 설의식(薛義植)이 간행한《이순신수록(李舜臣手錄) 난중일기초(亂中日記抄)》에서부터 시작된다. 이때 설의식은 이 책의 권두부분에 《충무공유사》의〈일기초〉에 들어 있는 〈무술일기〉초고 사진 1장을 도판(圖版)으로 처음 소개했다.

   그후 1960년 4월 이은상은《난중일기》에 대한 원문교열을 마치고 문교부에서《이충무공난중일기》를 간행하였다. 이때 〈일기초〉에 들어 있는 무술년 일기의 원문을 처음으로 교감하여 원문에 보유하였다. 그후 1968년 《난중일기》번역본(현암사)을 간행하면서 무술년 11월 8일년부터 17일까지의 〈일기초〉의 일기를 포함시켰다. 비록 〈일기초〉의 작은 부분이지만, 〈일기초〉에 대한 최초의 연구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후대의 연구자들은 이러한 사실을 전혀 밝히지 못한 채 〈일기초〉에 대한 해독을 시도했으나 영인본 상태가 매우 좋지 못한 관계로 역시 오독의 글자들을 남기게 되었다. 필자는 2007년 《충무공유사》전편을 해독하면서 〈일기초〉를 완벽하게 해독하여 새로운 일기 32일치를 찾아냈고 이것을 기존 《난중일기》번역본에 삽입하였다.

   돌아보건대《난중일기》에 대한 번역은 1916년 조선연구회의 주간인 아요야 나기 난메이(靑柳南冥)에 의해 일본어로 처음 시도되었다. 그러나 을미년 5월 29일까지만 번역하다가 도중에 그쳤다. 그후 1935년 조선총독부 관할 하의 조선사편수회(이마이다 기요노리(今井田淸德) 회장)가 초고본을 다시 해독하여 《난중일기초》가 나오게 되었다. 이는 판본이 비록 완벽하지는 않지만, 전편을 다룬 점에서 1795년 정조 때 간행된 활자본 《이충무공전서》본 난중일기 보다는 진전 있는 작업이었다.

   2013년 5월 필자는 1955년에 간행된 홍기문의 최초 한글본 《난중일기》를 국내에 최초로 소개하였다. 근래까지만 해도 최초의 《난중일기》번역자가 이은상인 것으로 알려져 왔지만 이미 그전에 한글완역본이 나왔던 것이다. 이는 이순신연구계에 매우 고무적인 일이었다. 더욱이 이를 이은상의 번역본과 비교해본 결과, 이은상이 상당한 영향을 받은 사실도 알게 되었다. 물론 필자도 홍기문의 《난중일기》 중 잘 번역된 내용을 인용하였다. 또한 필자는 이순신이 나관중의《삼국지통속연의(三國志通俗演義)》에서 인용한 《난중일기》내용도 최초로 발굴하였다.

   그후 고상안(高尙顔)의 문집 《태촌집(泰村集)》에서 새로운 일기 3일치[3월 30일과 4월 8일 12일자]를 찾아냈고, 최근에는 배흥립(裵興立)의 문집인 《동포기행록(東圃紀行錄)》〈잡록〉에서 《난중일기》를 초록한 일기 6일치를 확인하였다. 특히 약포(藥圃) 정탁(鄭琢)의 《임진기록》에서 이순신이 1594년 3월 10일에 작성한 장계 초본 1편〈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장계초(三道水軍統制使李舜臣狀啓草)〉을 찾아 명나라 담종인의 금토패문 전문을 발굴했다. 이는 기존〈장계〉에 없는  내용이다.

  필자는 이러한 일련의 연구과정을 통해《난중일기》에 관한 종합정리된 결과물을 최근에 내놓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개정판 《교감완역 난중일기》이다. 이는 처음 출간했던 동아일보사와 교감본을 출간한 민음사를 거쳐 오면서 나름의 계보가 만들어진 연구서이다. 최근에는 인명과 지명, 그리고 당시의 용어들에 문헌고증까지 더하여 학술적인 가치를 높였다. 그간 《난중일기》연구에 있어서 해독상의 문제점들을 해결하여 완벽을 기한 성과에 대해 많은 세인들의 밝은 상감(賞鑑)을 기대한다.

글 : 노승석 이순신 전문연구가(교감완역 난중일기 저자)

노승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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