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서 해독과 교감(校勘)

   이순신의 《난중일기》는 한문 서체의 하나인 초서(草書)로 작성되어 있다. 급박한 전쟁 상황 속에서 속기하는 데는 이 초서체 글씨가 매우 효율적이다. 얼핏보면 작성자가 임의대로 쓴 것 같지만 초서체에도 일정한 법식이 있다. 단지 풀처럼 흘려 쓸 뿐이지 글자의 형태는 반드시 옛 법첩을 근거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수백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옛 초서글씨를 해독할 수 있는 것이다.

   초서는 본래 예서(隸書)에서 파생된 서체로서 초예(草隸)라고도 하였다. 그 후에 장초(章草, 예초)가 나왔고, 한나라 말 장지(張芝)가 장초 가운데 남아 있는 예서필획의 흔적을 없애고 금초(今草)를 만들었다. 당(唐)나라 때는 장욱(張旭)과 회소(懷素)가 금초를 발전시켜 광초(狂草)를 만들었다. 이 금초와 광초의 형태가 오늘날 현재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이순신이 주로 사용한 서체는 동진(東晉)의 왕희지의 서체인데 필획이 웅장하면서도 매우 힘이 있다. 《난중일기》전편의 글씨들은 나름대로 일정한 법식이 있고 통일성이 유지되어 있다. 치열한 전투를 치른 때에 작성된 것일수록 흘림의 정도가 매우 심하다. 특히 수정과 삭제를 반복한 흔적이 남아 있는 부분에서 후대에 해독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었다.

   1795년 정조의 명으로 윤행임과 유득공이 초서체 《난중일기》를 정자로 해독하여 《난중일기》를 간행하였다. 그런데 아쉽게도 일부 내용이 누락되고 산절되어 원형대로 해독되지 못하였다. 그후 1935년 조선사편수회가 《난중일기》전편을 다시 해독하여 《난중일기초》를 간행했다. 이 역시 판본상의 문제가 있지만은 후대에는 이것이 전서본과 함께 《난중일기》판본의 전범이 되었다. 1916년 일본인 아요야 나기 난메이(靑柳南冥(綱太郞))가 전서본《난중일기》를 일본어로 처음 번역하였다. 1955년 홍기문(洪起文)은 전서본과《난중일기초》를 토대로 《난중일기》를 처음 한글로 번역하였다.

   1960년대 이은상이 《충무공유사》의《일기초》와 전서본, 《난중일기초》를 토대로 《난중일기》를 번역한 이후, 우리나라에는 이와 유사한 《난중일기》번역서가 봇물을 이루었다. 특히 이은상은 최초 번역자인 홍기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후 친필 초고원문에 대한 새로운 해독이 일본과 국내에서 있었지만, 큰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후대에 남은 《난중일기》의 판독문제는 대부분 미상과 오독에 해당하는 지극히 어려운 내용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를 일일이 검독하고 200여 곳을 교감(校勘)하여 《난중일기 교감기》를 최초로 작성했다.

   초서에는 동형이자(同形異字)의 형태가 많기 때문에 매우 주의가 요망된다. 글자 형태를 맞게 판독했어도 문맥에 맞지 않으면 오독이 되고, 문맥에 맞아도 글자의 형태가 맞지 않으면 역시 오독이 된다. 문팔초이(文八草二)라는 말이 있듯이 초서해독의 관건은 정확한 자형 파악과 함께 문장을 해독할 수 있는 문리력이 반드시 뒷받침 되어야 한다.

    고전 중에서 초서 해독과 교감에 관한 문제는 고전연구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점이다. 수십년 이상 한문문리를 터득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할 수가 없기 때문이이다. 새로운 판독내용이 잘 되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그 원문을 해석한 문장이 문맥에 잘 맞는지를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기존의 전고에 없는 내용과 전후 문맥에 맞지 않는 내용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오독이고 오역인 것이다. 중국 청나라 때 학자 단옥재(段玉裁)는 “한문 문리로서 글자의 시비를 가리는 것이 가장 어렵다. 고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없을 경우에는 잘못되지 않은 것을 잘못된 것으로 만들어 심각한 혼란을 초래한다.”고 했다. 이는 고전번역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말이다. 새로 수정한 글자가 더 잘못되는 문제를 경계해주기 때문이다.

          글 : 노승석 이순신 전문연구가(교감완역 난중일기 저자)

노승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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