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헤이안 시대 3대 재녀 중 하나인 이즈미시키부의 와카(和歌)집이다. 와카는 일본 고유의 정형시로, 헤이안 시대 사람들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더 품격 있고 재치를 뽐내는 의사소통 수단이었다. 격정적인 연애로 헤이안 전체를 떠들썩하게 했던 여인답게 작품에도 열정과 당당함, 섬세함이 넘쳐흐른다. ≪이즈미시키부 일기≫와 함께 읽으면 더욱 감동적이다.

와카는 일본 전통시 가운데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데, 5·7·5·7·7조의 5구 서른한 음절로 이루어진 정형시다. ≪이즈미시키부집≫과 ≪이즈미시키부 속집≫에 수록된 와카는 무려 1500여 수에 달한다. 이 외에 이른바 와카의 국정 교과서라 할 수 있는 칙찬 와카집에 선정된 240여 수를 포함하면 중복된 노래를 감안하더라도 이즈미시키부가 읊은 와카는 2000수에 육박한다.

칙찬 와카집에 채택된 240수는 여류 가인 가운데 압도적으로 많다. 이 노래들이 그녀 생존 시기에 편찬된 ≪습유 와카집(拾遺和歌集)≫부터 중세(1192∼1603) 시대 마지막 칙찬집인 ≪신속고금 와카집(新續古今和歌集)≫까지 400여 년(1006∼1439)에 걸쳐 편찬된 19개 칙찬 와카집 가운데 18개에 달하는 거의 모든 칙찬 와카집에 골고루 선정된 것으로 볼 때 그녀가 당대부터 사후에 이르기까지 실력파로 인정받은 유명한 가인이었음을 가늠할 수 있다.

당대 가인 가운데 가집을 남긴 사람은 적지 않지만 이즈미시키부처럼 많은 노래를 남긴 사람은 드물다. 그녀의 노래는 소재나 표현법 등에서도 새로운 창작 태도를 보여 주면서 내용면이나 기교적인 면에서 다양하고 새로운 시도를 보여 준다.

≪고금 와카집≫을 규범으로 삼은 헤이안 시대 중기의 와카는 일반적으로 동음이의어의 묘미를 살린 가케고토바(掛詞)와, 유사한 이미지의 어휘를 사용한 엔고(緣語)를 구사하면서 자연 경물에 빗대어 심정을 표현하는 이른바 ‘기물진사(寄物陳思)’형 노래가 주류를 이룬다. 이즈미시키부도 ‘기물진사’형 노래를 다수 읊었으며 그 가운데 뛰어난 노래로 인정된 작품도 보인다.

하지만 아무런 풍경도 등장시키지 않고 사랑의 섬세한 감정만을 있는 그대로 진솔하게 읊은 ‘정술심서(正述心緖)’형 노래들에서 더욱 독보적인 매력을 발산한다. 이러한 그녀의 노래는 천 년의 세월을 견디며 현대에 이르기까지 시공간을 초월해 여전히 꾸준한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다.

지은이 이즈미시키부(和泉式部, 978?∼1036?)는 10세기 말에서 11세기 초엽에 걸쳐 활약한 여류 가인이다. 일본 문학사에서는 헤이안(平安, 794∼1192) 시대, 또는 중고 시대라 불리는 시기에 해당한다. 그녀의 부친은 에치젠(越前, 지금의 후쿠이 현 북동부 지역) 지방의 수령인 오에노 마사무네(大江雅致)라는 인물이다.

이십 세 무렵 이즈미 지방 수령인 미치사다와 결혼한 이즈미시키부는 ‘시키부’라는 이름에 남편 부임지인 ‘이즈미’가 붙어 이즈미시키부라 불리게 된다. 남편 미치사다와의 사이에 태어난 딸이 고시키부(小式部)다. 그녀는 남편 부임지에 머문 적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 도읍지인 교토에서 지냈다. 그러는 동안 레이제이(冷泉) 천황의 셋째 아들인 다메타카(為尊) 친왕의 사랑을 받게 된다.이로 인해 그녀는 부친으로부터 의절을 당하고 미치사다와의 부부 관계도 깨지고 만다.

그러나 1002년 6월 다메타카 친왕은 스물여섯의 나이로 사망한다. 다메타카 친왕의 죽음을 애도하며 자숙의 시간을 보낸 지 1년이 되는 시점에 극적으로 시작된 것이 바로 아쓰미치 친왕과의 사랑이다. 레이제이 천황의 넷째 아들인 아쓰미치 친왕은 대재부(大宰府)의 장관인 대재수(大宰帥, 다자이노소치) 직책을 맡았던 관계로 소치노미야(帥宮)라 불렸다.

신분을 초월한 사랑과 굳은 결속으로 하나가 된 소치노미야와 보낸 기간은 이즈미시키부 생애에서 가장 빛나던 화양연화와 같은 시기였다. 스물여덟 살에는 그와의 사이에서 아들 이와쿠라노미야(石蔵宮)도 출산한다. 그러나 소치노미야도 1007년 10월 스물일곱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면서 그들의 사랑도 4년 만에 막을 내리고 만다. 사별 후 그를 향한 그리움은 면면하게 이어졌으며 결국 애절한 통곡은 가집에 120여 수에 달하는 만가(挽歌)로 남는다.

소치노미야 사망 일주기 후, 이즈미시키부는 딸 고시키부와 궁중으로 출사해 쇼시(彰子) 중궁을 모시게 된다. 궁중에는 이미 무라사키시키부(紫式部)와 이세노다이후(伊勢大輔) 등 걸출한 재원이 출사해 있었다. 무라사키시키부도 ≪무라사키시키부 일기(紫式部日記)≫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즈미시키부는 그녀들 사이에서 돋보이는 존재였던 듯하다.

출사한 지 1, 2년 뒤에 이즈미시키부는 당대 최고 권력가였던 후지와라노 미치나가(藤原道長)의 권유로 후지와라노 야스마사(藤原保昌)와 서른두 살 무렵 결혼한다. 이후 야스마사의 부임지인 단고(丹後, 지금의 교토 북부 지역) 지방으로 내려가 잠시 머물기도 하지만 스무 살 이상의 나이 차이로 노령에 가까운 야스마사와의 결혼은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던 듯하다. 그로부터 50대에 들어선 이즈미시키부의 행적은 묘연하다.

이즈미시키부는 20대 중반에 충격적인 다메타카 친왕과의 사별을 거쳐, 30대에 생애 가장 사랑했던 소치노미야와의 사별에 이어 40대 후반에 다시 보석 같은 딸 고시키부를 여읜다. 자식을 가슴에 묻고 죽음보다 더한 슬픔은 노래로 승화되어 남아 있는데 모성애가 발현된 뛰어난 노래로 인정받고 있다. 이로써 그녀는 일생 동안 세 번에 걸친 크나큰 사별의 고통으로 인간 존재의 덧없음을 절감했으며, 동시에 두 번에 걸친 크나큰 사랑을 가슴에 담은 채 생을 마감하게 된다. (출간: 지식을만드는지식)

임영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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