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된 강화

    1594년 정초에 이순신은 여수 송현마을 내 고음내에 계신 어머니를 찾아 뵈었다. 남의길(南宜吉)과 윤사행(尹士行), 조카 분(芬)이 동행했다. 그 당시 80세인 노모는 숨을 가쁘게 쉬어 살아 계실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생각에 이순신은 그만 감춰진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하룻밤 묵은 뒤 이순신은 전쟁 중이라 오래 머물 수 없어 어머니께 하직을 고했다. 그러자, 어머니는 “부디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으라”고 당부하면서 조금도 이별의 심정으로 슬퍼하지 않았다.           -《난중일기》갑오년 1월-

   그 당시 조선 수군은 한창 기근과 전염병으로 매우 피폐한 상황이었다. 많은 결원이 생기고 병사를 징발하는데도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이런 와중에 3월 4일 이순신은 2차 당항포해전을 치르는데, 이때 조방장(助防將) 어영담(魚泳譚)을 시켜 왜선을 공격하게 하였다. 어영담 부대는 진해 읍전포(邑前浦)에서 6척, 고성 어선포(於善浦)에서 2척, 진해 시굿포(柴仇叱浦)에서 2척을 분멸하고 그 후 포구 안으로 들어가 나머지 21척도 모두 분멸하였다.

   한편 명나라는 왜적과 강화할 목적으로 심유경(沈有敬)을 파견하여 화해할 것을 결정했다. 선유도사(宣諭都司) 담종인(譚宗仁)은 왜군의 꾀임에 빠져 이순신에게 왜군을 치지 말라는 통보문인 금토패문(禁討牌文)을 보내왔다. 이에 이순신은 “왜적은 믿을 것이 못되니 화친하려고 한다는 것은 거짓이오. 나는 조선의 신하된 자로서 의리상 이 적들과 한 하늘 아래서 함께 살지 않을 것이오.”라고 답하였다.


   지금까지 이 금토패문은《이충무공전서》에 간략한 내용으로 전해져 왔다. 그런데 최근 필자가 이에 대한 전문을 처음 해석하여 개정판 《교감완역 난중일기》에 수록하여 발표하였다. 이 내용의 존재는 9년 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간행한 정탁(鄭琢, 1526∼1605)의 문적(보물 494호) 영인본(1991) 안에서 《임진기록(壬辰記錄)》을 보고 처음 알게 되었다. 이는 이순신이 1594년(갑오) 3월 10일에 작성한 장계(達本)를 정탁이 옮겨 적은 내용으로, 총 8장(15면) 분량인데 《이충무공전서》에 있는 이순신의 장계 2편(〈당항포파왜병장〉, 〈진왜병장〉)과 함께 실려 있었다.

   본래 갑오년 3월 10일에 이순신이 작성한 장계는 〈여러 의병장들에게 상을 내리기를 청하는 장계(請賞義兵諸將狀)〉, 〈군량을 조처해주기를 청하는 장계(請措劃軍粮狀)〉〈왜군의 정세를 아뢰는 장계(陳倭情狀)〉,〈당항포에서 왜병을 격파함에 대한 장계(唐項浦破倭兵狀) 등 모두 4편이 있다. 그런데 금토패문이 실린 장계내용이 있다는 것은 그 당시에 작성된 또다른 장계가 있었거나 금토패문을 별도로 보고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필자는 몇 년 전에도 선조의 교서문서를 발굴하여 해독하는 과정에서 이와 같은 금토패문의 전문이 또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했었다. 그 당시 명나라가 일본과 강화협상을 추진하는 중에 작성한 금토패문을 이순신이 받아보고 장계를 통해 선조에게 보고하였고, 조정에서도 그 문제의 심각성을 중요하게 인식하여 관문서에 재인용한 것이다. 그 문제가 된 내용의 요지는 ‘일본장수들은 전쟁을 하지 않으려고 하니 조선이 일본을 공격하는 것을 금지한다. 이를 어기면 조선국왕에게 알려 처벌하게 할 것이다. 패문대로 시행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은 이러한 통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산도에 무과시험을 실시하고 여전히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글 : 노승석 이순신 전문연구가(교감완역 난중일기 저자)
 

노승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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