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도연명은 초야에 묻혀 절개를 지키며 살았던 전원시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러한 삶이 마냥 행복하거나 편안했던 것은 아니다. 그의 작품 세계에는 지조 있는 삶을 살면서도 끊임없이 흔들리고, 번민하는 시인의 모습이 잘 나타난다. 인간의 욕망이란 쉽게 다스리거나 놓아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복사꽃 피는 이상향은 대체로 현실에서는 찾기 어려운 백일몽에 가깝다. 그러나 그런 소망은 오늘도 현실의 고단함을 위로하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을 되돌려준다. 도연명의 시들이 여전히 우리에게 감동을 안겨주는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다.

도연명의 시는 현재까지 126수가 전해지는데, 지식을만드는지식이 펴낸 ≪도연명 시선≫에서는 그중 64수의 시를 골라 전원생활의 애환 / 음주의 효용과 정취 / 역사에 대한 감회와 현실 비판 / 인생의 갈등과 고뇌/ 기타, 총 5개의 주제로 나누어 실었다. 부록으로는 유명한 <귀거래사>(본서에는 <돌아가리라>)와 ≪송서(宋書)≫ 의 <도연명전>을 실어 도연명의 삶과 문학 세계를 두루 감상할 수 있게끔 했다.

우리말로 번역된 시와 아울러 원문을 함께 배치했는데, 특히 역자인 송용준 교수의 상세한 해설과 주석이 돋보인다. 한문으로 시를 감상하고 싶은 독자들에게는 단어마다 실린 상세한 풀이와 문법적인 설명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1부인 ‘전원생활의 애환’은 도연명의 전원시들로 이루어졌는데, 혼탁한 세계를 벗어난 행복감과 함께 농사일을 하며 느끼는 고단함이 잘 나타난다. 도연명은 중국 시사에서 전원시를 개척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감상의 대상이자, 동시에 생계를 마련하는 생산 수단이 된 자연에서 느끼는 시인의 복합적인 감정들을 만날 수 있다.

2부인 ‘음주의 효용과 정취’에는 술과 관련한 시들을 모아놓았는데, <음주>라는 제목의 시만 해도 20수에 이를 정도로 그 수가 적지 않다. 그가 특별히 술을 사랑했다기보다는 위진남북조의 지식인들에게 술이란 “암담한 현실과 개인적인 번민으로부터 빠져나가는 수단”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술을 먹는 행위를 통해서, 정세를 비판하기도 하며, 삶의 유한함에 대한 철학적인 통찰을 펼치기도 한다. 물론 음주가 초야에 묻힌 시인을 위로하는 역할도 했을 것이다. 2부의 시들은 주로 음주 행위의 즐거움에 대한 것들이다.

3부인 ‘역사에 대한 감회와 현실 비판’에는 시인이 떠나온 세계에 대한 비판과 안타까움을 담은 시들을 모아놓았다. 전원시인으로서의 삶이 단순한 도피가 아니라, 그 나름의 적극적인 선택이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시에서 정세에 걸맞는 다양한 전고(典故)를 들며 간접적인 비판을 가한다.

4부인 ‘인생의 갈등과 고뇌’에서는 초야에서 살아가는 시인의 내적 갈등이 잘 나타난다. 그것은 유교적인 이상인 겸제천하(兼濟天下)에 대한 욕망과, 절개를 지키고자 하는 독선기신(獨善其身)의 삶이 빚어낸 결과물이다. 이러한 내적 투쟁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전원에서의 삶을 반드시 도피로만 볼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5부의 ‘기타’에는 아들이나 친구에 대한 애정이 담긴 시들과 유명한 <도화원기>(본서에서는 <복사꽃 마을의 이야기와 시>)가 실려 있다.

지은이 도연명(陶淵明)은 동진 애제(哀帝) 흥녕(興寧) 3년(365)에 강주(江州) 심양군(潯陽郡) 시상현(柴桑縣) 율리(栗里)에서 태어났다. 이름이 연명(淵明)이고 자가 원량(元亮)인데 왕조가 동진에서 송으로 바뀌자 잠(潛)으로 개명했다. 증조부 도간(陶侃)은 소준의 반란을 진압한 공으로 장사군공(長沙郡公)에 봉해졌으며, 그의 조부 도무(陶茂)는 무창태수(武昌太守)를 지냈고, 부친 도일(陶逸)은 안성태수(安城太守)를 지냈다고 하는데 비교적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도연명은 부친이 청렴한데다 일찍 죽은 탓에 빈한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그런 환경 속에서 젊었을 때는 유가(儒家)의 이상인 겸제천하의 큰 뜻을 품었다. 그러나 당시는 문벌을 중시하는 사회였기 때문에 중소 지주계급 출신의 도연명이 벼슬길에서 뜻을 이루기는 쉽지 않았다.

또한 타인의 간섭을 싫어하고 자유를 추구하는 성격을 가진 탓에 29세에 강주좨주(江州祭酒)로 처음 관직 생활을 시작한 이후 41세에 팽택령(彭澤令)을 마지막으로 완전히 귀은(歸隱)할 때까지 출사(出仕)와 퇴은(退隱)을 여러 차례 되풀이했다. 그가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관직 생활에서 느낀 괴로운 심경과 전원생활의 즐거움과 기대를 적은 것이 유명한 <귀거래사>다.

귀은 후 도연명은 가난하게 지냈지만 마음은 대체로 자유롭고 편안했다. 그러나 간간이 특별한 일도 있었고, 생활이 극도로 곤궁해질 때도 있었다. 44세 6월에 화재로 집이 전소되어 임시로 배를 거처 삼아 지내기도 했는데, 그때의 힘든 처지를 <무신년 6월에 화재를 당하고(戊申歲六月中遇火)>에 표현했다. 2년 남짓 임시 거처에서 살다가 46세에 심양(潯陽)의 남촌(南村)으로 이사했다. 이곳은 소박한 사람들이 여럿 살고 있어서 도연명이 평소 마음에 두고 있던 곳이다. 이사한 후에 지은 <이주(移居)> 2수에 그들과 이웃하며 어울리는 즐거움을 피력했다.

도연명의 50대는 동진이 송으로 교체되는 극도의 혼란기였다. 그는 왕위 찬탈 과정을 지켜보면서 불의를 비판하거나 개탄의 심정을 토로한 시를 여러 편 썼다. 특히 역사적으로 왕조 교체기에 굳센 절개를 지켰던 백이(伯夷), 숙제(叔齊), 상산사호(商山四皓)를 비롯한 과거의 의인(義人)들을 칭송함으로써 현실을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음주> 20수, <복사꽃 마을의 이야기와 시>, <가난한 선비>, <의고(擬古)>, <산해경을 읽으며>, <소광과 소수> 등이 모두 이때 지어졌다.

도연명은 63세 9월에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듯 <자제문(自祭文)>과 <만가(挽歌)>를 지었는데, 과연 두 달 후인 11월에 학질에 걸려 죽었다. 그는 죽기 전에 간소한 장례를 당부해 “살아서 풍족하기를 바라지 않았으니, 죽어서 넉넉하기를 구하지 않겠다. 부고를 생략하고 부의를 물리칠 것이며, 지나치게 슬퍼하지 말고 염습을 검소하게 하라”고 유언했다고 한다.

이종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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