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등신화≫는 중국 명대 소설이지만, 조선조 초에 이미 유입되어 왕조가 끝날 때까지 줄곧 읽힌 책이다. 김시습은 ≪전등신화≫를 읽고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를 내놓는다. 본서는, 현전하는 최고본으로 규장각에 소장된, 윤춘년과 임기가 한 구절 한 구절에 주석을 붙인 ≪전등신화구해≫를 번역한 책으로, 다른 ≪전등신화≫와는 차별성을 가진다.

지식을만드는지식이 펴낸 ≪전등신화≫는 전기소설(傳奇小說)이다. 전기란 명칭은 중국문학사상 당대(唐代) 이후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어 왔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전기소설이라 할 때는 당대 소설 내지는 그 계통의 소설 작품을 가리킨다. 주로 육조대(六朝代)에 성행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발전을 거듭한 당대의 전기(傳奇)는 창작 의식을 갖춘 작가에 의해 전해진 기이한 이야기이면서도 현실적 사회문제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묘사에 있어서도 훨씬 섬세하고 곡절 있으며 교훈적 주제까지 지니고 있어 작자의 개성과 사상을 비교적 분명하게 드러내 보인 것으로 평가받았다.

더구나 여기에는 당시(唐詩)의 난숙함과 고문(古文)의 사실적인 정신이 잘 살아났고, 불우한 문인들의 온권(溫卷) 풍습까지 유행해 훌륭한 작품을 창작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유능하면서도 불우했던 작가들의 낭만 정신의 발로야말로 꿈과 환상이 있었고, 작품 속에 의미를 담아내려 했던 유가적 재도(載道) 문학의 굴레를 벗어나 예술적 가치를 창조하는 쪽으로 기울면서 단편소설로서의 문학적 지위를 확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공좌와 백행간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러한 전기소설의 전통을 계승해 당시에 유행하던 기괴한 내용들을 소재로 창작된 대표적인 명대 문언소설이 ≪전등신화≫다. 내용은 비록 지괴적인 소재를 채용했지만 현실과 사상의 표현 수법 면에서는 작가가 적극적인 환상 수법을 이용하고 있다.

누구나 주어진 환경 속에서 자신을 적응시키는 방법을 끊임없이 모색하지만 현실적인 삶의 조건에서 좌절하거나 갈등한다. 그러다가 간혹 현실 밖으로 삶의 영역을 확장하다 보면 좌절도 극복하고 원망(怨望)도 풀리게 되는 것이다. 전기소설은 이 같은 인간 욕망을 환상이란 공간을 통해서 확장한 삶이기에 현실적이다.
이 책에 수록된 총 21편의 이야기는 모두 이런 내용을 다루고 있다. <연방루기>, <추향정기>는 현실적 바탕 속에서 이루어진 환상이지만, 나머지 작품들은 아예 작자의 환상을 다루고 있다.

현세에 만족하지 못하거나 불우한 삶을 사는 등장인물이 요괴·괴물·용궁·도교·불교 등을 만나 발생하는 기이하고 흥미진진한 비현실적 세계다. 표면상으로는 남녀 간의 애정의 문제를 다루어 낭만적 경향으로 치우치고 있는 듯 보이지만 그것은 인도주의의 발로로 인한 인간 평등의 새로운 가치관을 확립한 것이라 할 것이며, 또한 인간과 귀신이 서로 교유하는 문제를 다루어 얼핏 보면 괴기적 경향으로 치우치는 면도 있지만 그것은 인간과 괴리된 별개의 귀신이 아니라 인간화된 귀신을 다룸으로써 결코 인간의 문제를 벗어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장사성의 반란 속에서 만남과 이별을 경험하는 민중들의 고뇌와 현실적 모순을 환상 체험을 통해 그리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비현실적 요소’와 ‘현실적 요소’의 교차적 관계는 작가의 주관에 의해 표현되고 구현된 독창적 환상이란 점에서 우리들에게 새롭고 신선하게 다가선다고 볼 수 있다.

15세기 이후 ≪전등신화≫가 광범위하게 유포되기 시작하면서 ≪전등여화(剪燈餘話)≫를 비롯한 다수의 소설 창작에 영향을 주기에 이르고 특히 한국, 일본, 베트남 등 동아시아 각국에서 이 ≪전등신화≫의 영향을 받아 창작된 우수한 작품들이 등장하기에 이른다.

조선조 문단에 ≪전등신화≫가 유입된 것은 창작 이후 얼마 되지 않은 시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초 ≪금오신화≫를 창작한 김시습(1435∼1493)은 ≪전등신화≫를 읽고 난 감동을 하나하나 적어 놓은 <제전등신화후(題剪燈新話後)>라는 글을 남겼고, 또 ≪전등신화≫의 영향을 받은 ≪전등여화≫가 <용비어천가>에 언급된 바 있어, ≪전등신화≫는 이보다는 먼저 유입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시기는 이미 우리에게 ≪수이전(殊異傳)≫이라는 전기소설집이 있었고 특히 전기문학의 틀을 완전하게 갖춘 <최치원>이란 작품이 창작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태평광기(太平廣記)≫나 ≪설부(雪郛)≫ 같은 전기소설을 수록한 총서류가 이미 독서계에 유입되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일정한 문학적 수준을 갖춘 작품을 창작하고 감상코자 하는 토대와 열의가 이미 갖춰진 상태에서 같은 성격을 지닌 ≪전등신화≫가 유입되자 그것이 가져다주는 전기적, 환상적 감동은 더욱 증폭되어 조선 문단을 압도해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연산군은 중국에 가는 사신을 통해 ≪전등신화≫를 사오도록 해서 그것을 간행할 것을 명했을 뿐만 아니라 직접 읽고 대화 중에 인용하기도 했다. 더구나 윤춘년과 임기는 ≪전등신화≫의 한 구절 한 구절에 주석을 붙인 ≪전등신화구해≫라는 책을 간행하게 되는데 이 책은 조선의 식자층에 가장 널리 읽힌 책이 되었다.

이렇게 이 책이 유행하게 된 데는 아마도 남녀 간의 만남과 이별을 다룬 애정 소설로서의 긴박성이나 인간 욕망을 구현해 줄 괴기적 환상성이 소설로서의 흥미를 지녔을 뿐만 아니라, 이 속에 담긴 무려 150여 편의 서책과 60여 인의 시문에서 다양한 문체를 참고할 수도 있었으며, 삽입문으로 사용된 미려한 문체를 그대로 쓸 수 있는 실용성까지 지님으로써, 이보다 훌륭한 책이 당시로서는 없었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싶다.

≪전등신화≫는 원말명초의 학자 구우(瞿佑, 1347∼1433)가 창작했다. 그는 자를 종길(宗吉), 호를 존재(存齋)라 한다. 절강성(浙江省) 전당(錢塘: 지금의 항주) 출신으로 학식도 풍부하고 문필에도 능해 14세 때에 이미 문명을 사방에 떨쳐 당시 대문장가였던 양유정의 인정을 받았다. 청장년기인 홍무 연간(洪武年間, 1368∼1398)에 인화·임안·의양 등지의 훈도로 있다가 노년기인 영락(永樂, 1403∼1424) 때에 주왕부의 우장사를 지냈으나, 61세[영락 6년(永樂六年), 1408]에는 견책을 당해 섬서성 보안으로 귀양을 간다.

18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고 78세[흥희 초년(洪熙初年), 1425]에 비로소 영국공 장보의 주청으로 석방되어 원직에 복직했고 한때 내각판사로 있었다. 그리하여 3년 동안 영국공가의 숙사 생활을 하면서 예우를 받다가 81세[선덕 3년(宣德三年), 1428]에 고향으로 돌아가 86세[선덕 8년(宣德八年), 1433]에 생을 마감한다. 저작으로는 ≪전등신화≫ 외에도 ≪귀전시화≫, ≪존재시집≫, ≪악부유언≫, ≪춘추귀주≫, ≪여청곡≫ 등이 있었다고 중교 서문에 전하지만 확인할 수 없다가 최근 그중에서 ≪악부유언≫이 중국 남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음이 확인됨으로써 그의 많은 작품들이 후대에 들어 간행되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또한 그의 시가 ≪열조시집≫, ≪명시기사≫ 등에 실려 있다.

조성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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