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의 재해석

   1597년 9월 16일 왜선들이 명량해협의 울돌목[鳴梁]을 거쳐 곧장 조선수군의 진지가 있는 우수영을 향하자, 이순신은 수군에게 출동 명령을 내렸다. 이에 왜군의 세키부네(關船) 133척이 수군의 배 13척을 포위하였고, 여러 장수들은 중과부적의 상황임을 알고 회피하려고만 하였다. 이순신은 부하들을 타이르면서 “적이 비록 천 척이라도 감히 우리 배를 바로 공격하지 못할 것이니, 조금도 동요하지 말고 힘을 다해 적을 쏘라.”고 명했다.

   이때 전라우수사 김억추(金億秋)가 탄 배는 이미 2마장(馬場, 약 800m) 밖에 있었는데, 이순신은 적진 앞으로 돌진하여 지자(地字), 현자(玄字) 등의 각종 총통을 난사하였다. 군관들도 합세하여 적의 무리가 쉽게 저항하지 못했다. 그러나 적에게 몇 겹으로 포위되어 있어서 장차 어찌 될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여러 부하들의 배는 먼 바다로 물러가 있고, 왜적들은 공격해올 태세라서 이순신은 진퇴양난의 상태였다.

    이에 이순신은 중군에게 명령하는 깃발을 세우게 하고 초요기(招搖旗)를 세웠다. 후방에 있다가 온 안위(安衛)에게 군법으로 경고하자, 안위는 적선 속으로 돌진하였다. 또 중군장 김응함(金應諴)을 불러서 당장 처형하고 싶지만 잘만 싸우면 전공으로 인정해 주겠다며 사기를 북돋아주었다. 이 두 사람의 배가 먼저 교전하고 있을 때 왜선 2척의 왜병들이 일시에 안위의 배에 개미처럼 달라붙어서 기어가며 다투어 올라갔다. 이것이 이른바 왜적들이 주로 사용한 등선백병전이다.

    안위와 그 부하들은 각기 죽을힘을 다해서 혹은 능장(稜杖, 각진 몽둥이)을 잡고 혹은 긴 창을 잡고 혹은 수마석(水磨石, 반들거린 돌) 덩어리를 무수히 난격하였다. 적선 3척이 거의 전복되었을 때 녹도 만호 송여종과 평산포 대장(代將) 정응두(丁應斗)가 협공하여 마침내 왜적을 섬멸할 수 있었다.  수군이 위기를 기회로 이용하여  왜군을 물리쳐 승리하기까지 능장(稜杖)의 역할도 중요했다.

   이 능장(稜杖)에 대하여 1955년 홍기문은 “작대기”로, 1968년 이은상은 “모난 몽둥이”로 해석했다. 그러나 능장(稜杖)은 작대기나 모난 몽둥이라고만 할만큼 의미가 간단하지 않다. 필자가 최근에 출간한 개정판 《교감완역 난중일기》(2016, 여해)에 능장(稜杖)에 대해 새롭게 고증하였다. 본래 능장(稜杖)은 밤에 순찰할 때나 전쟁할 때 사용한 휴대용 나무방망이었다. 이덕홍의《간재집》에 “아군이 적군을 제어하는 데는 철타(鐵打)와 능장을 사용하는 것이 제일이다. 능장은 서로 빌리기가 매우 쉽고 사용하기도 매우 간편하다.”고 하였다.

   조선시대 때 범죄를 예방하거나 바다에서 수군들이 죽을힘을 다해 왜적을 타격하기 위해 사용했던 능장은 중요한 전략무기로 사용된 것이 틀림없다. 이 능장의 의미를 오늘날 현대사회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우선 자신을 성찰하고 반성하는 데도 이 능장의 의미가 필요하다. 악(惡)을 경계하고 선(善)을 향상시키는 권선징악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올바른 정의사회를 구현하기 위해 비리와 부정부패를 척결하는 데도 이 능장의 의미를 되새겨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글 : 노승석 이순신 전문연구가(교감완역 난중일기 저자)

노승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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