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한국사이베이스 송년 기자간담회에 참석해 간담회가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는 사이, 연말이란 분위기를 먼저 느끼게 한 것은 회사 측에서 기자들에게 나눠주기 위해 준비한 명년 다이어리였다.

짙은 밤색 거죽에 ‘SYBASE’란 회사 로고가 선명히 박혀 간담회 테이블 좌석 마다 놓인 이 다이어리 맨 앞엔‘monthly Plan’ 그러니깐 우리말론 ‘월간계획’이라는 섹션이 있었고, 해당 달의 표식 바로 밑엔 흔한 다이어리에선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월간목표’라는 공난이 있었다.

2009년 연말에 그 공란을 보면서‘살아오면서 달마다 어떤 목표를 세워 무엇을 열심히 실천한 적이 있었나?’라는 의문을 가볍게 스스로에게 던져 보았다.

그러나 몇몇 기자가 시간을 못 맞춰 올 때까지 잠시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는 이유로 간담회가 10분쯤 지연된 사이, 시간도 때울 겸 월간목표에 대한 의문을 한 차례 다시 한 차례 또 한 차례 그렇게 머리 속으로 자꾸 되네였더니, 가벼웠던 의문은 점점 무거워지기 시작해, 어느 새 지난해를 돌아보게 했고, 그 전해를 들추어보게 했고, 그렇게 자꾸자꾸 몇 해을 되짚어 보았지만, 그 회상 속에선 월간 목표라는 것을 확인할 수 없었으니, 스스로 못났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런 저런 생각이 꼬리를 무는 어느 순간에 간담회는 시작됐고,  주로 사이베이스의 올해 성과와 내년 사업계획을 개괄적으로 설명하는 내용으로 간담회가 진행됐다.

이 회사의 사령탑인 김태영 사장은 먼저 인사말을 통해 “해마다 하는 연말행사이지만, 올해는 경기가 어려운 가운데 진행한 것이어서 행사가 서로의 안부를 묻는 자리가 될 것”이라며 올해 사업의 성과가 녹녹치 않았음을 우선 말해주었다.

“경기가 어려운 가운데 지난해 만큼의 성과를 냈으나, 본사에서 요구한 것만큼은 아니어서 아쉬움은 남는다. 다만 국내 매출이 전체 사이베이스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여전히 높아 한국 지사의 위상은 탄탄한 상태라고 보면 맞다.”

이렇게 밝힌 김 사장은 내년엔 “클라우드, 클러스터링, 모바일 관리 등의 새로운 사업분야에 관심을 갖고 고객을 만날 계획”이라며 “이런 시장을 공략하기 위한 제품을 가지고 있고 일부 고객을 확보한 만큼 성과가 적잖이 기대된다”고 덧붙였다.

간담회 자리를 파한 후에 일행은 회사 근처 음식점에서 저녁식사를 함께 했고, 김태영 사장의 옆자리에 앉을 기회를 얻게 된 기자는 살아오면서 월간목표도 한번 세워보지 못한 불쌍한 인생인지라, 한참 인생 선배라 할 수 있는 김 사장에게 몇 가지 삶의 조언이라도 들어서라도, 지난 30여 년 간의 불량했던 시간을 땜방해야겠다는 가상한 생각을 품게 됐다.

음식점에 들어섰을 때 자리에 참석한 이들끼리 가졌던 어색함을 소주 몇 잔에 털어낸 후 대화 분위기가 제법 시끌벅쩍하게 무르익었을 때, 몇 가지 질문을 김 사장에게 던져 보았다.

- 사장님께선 어떤 목표를 갖고 인생을 살아오셨어요.

이렇게 불쑥 말을 꺼내고 나니 ‘질문을 하는 요령도 참 못났다’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답변하기엔 꽤나 벅찬 질문이 첫 방으로 들어간 셈이다.

“글쎄요. 특별히 거창한 목표를 갖고 지금껏 살아온 건 아닙니다. 그저 매일매일 주어진 일들을 열심히 하면서 살다 보니 벌써 지천명을 넘겼습니다. 우리 세대가 다들 그렇게 일에 치여 숨가쁘게 살아왔다고 보면 맞아요.”

- 그래도 30년 넘게 사회생활을 하면서 얻은 몇 가지 삶의 지혜 혹은 지침이 있을 것 같은데요.

“사회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도 좋지만, 쉴 때 잘 쉬는 법을 아는 것도 그 못지 않게 긴요해요. 한 개인이 긴 세월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어쩔 수 없는 공백기가 있을 것인데, 이 쉬는 시간을 잘 쓰기 위한 대비를 일하는 사이에 해둘 필요가 있어요.”

“제가 몇 해 전에 IBM을 그만두고 새 직장을 얻을 때까지 1년 반이란 기간 동안 자의반 타의반으로 쉬어야 할 때가 있었어요. 쉬기 전에 모든 시간을 일을 하는데 썼기 때문에 그 공백기엔 정작 무엇을 하면서 시간을 즐겁게 보내야 할지, 그러니까 쉼이란 시간을 쓰는 방법을 배우지 못해 몰라서 곤궁한 시간을 보낸 적이 있었죠. 당연히 불편하고 불안한 시간이 되었어요.”

- 사모님께서 공백기를 함께 채워주지 않던가요?

“우리 집사람은 내가 직장을 쉴 때에 말이죠, 내가 직장을 다닐 때와 같은 생활 태도를 유지하면서, 자기가 만든 세계에서 그네의 시간을 썼지, 시간을 별도로 빼서 저에게 쓰진 않았더라구요.”

“그래서 주로 혼자 시간을 보내게 되었는데, 그런 불편함을 극복하려면 일을 하지 않고 쉴 때도 무엇에 참여할 수 있는 일 거리 혹은 커뮤니티에 관심을 가져야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덜어내는데 도움이 될 수 있어요.”

직장을 다니면서 실직을 한다는 것은 일반인들에게 매우 큰 고통이 일 것이다. 김 사장은 그 고통을 완전히 해소하지는 못하지만, 해소하기 전까지 고통을 덜거나 혹을 즐기는 지혜, 즉 ‘어떻게 잘 쉴까’하는 물음에 대한 한 가지 답을 제시해 준셈이다.

이유야 알 수 없지만, 김 사장은 평소 음주를 즐기지 않는다고 했다. 그날도 건배는 여러 차례 했지만, 유리잔 속의 소주는 거의 줄어들지 않았다. 술을 들지 않는 것이 궁금하다며 물었더니, ‘술을 마시지 않은지 오래 됐다’며 던진 질의에 시간을 추가해 답을 하고선, ‘영화 보는 것은 좋아하냐’고 대화의 주제를 전환하며 김 사장이 되물어 왔다.

시내에 일이 있어 간혹 버스를 타고 종로3가를 지날 때면 3가 사거리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단성사, 피카다리극장, 서울극장에 걸려 있는 개봉영화 간판을, 무엇인가 추억을 담은 눈으로 아련히 쳐다보는 일이 요즘 영화보기와 관련된 모든 행위라고 답을 주었다.

“백야행이란 영화 아세요.”김 사장이 빙긋 웃으며 다시 물었다.

“아! 한석규, 고수, 손예진이 나오는 영화로 알고 있는데요. 내용은 잘몰라요. 그냥 뭐! 전 한석규란 배우를 어렸을 적부터 좋아했기에, 이 영화를 한번 봐야겠다는 의지만 품고 있어요.”

“그 영화 보는데 관심 좀 가져 주세요.”

“특별한 이유라도...왜요?”

“제 아들 놈이 이 영화의 카메라 스텝으로 참여하고 있어요. 영화가 끝나면 자막에 작지만 이름도 나와요.”

이런 부탁을 하는 김 사장은 그가 키워 이제 이십대 중반에 들어선 자식이 사회의 일원으로 참여해 무언가를 목표로 일하고 있다는데 부모로서 큰 기쁨을 느끼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자식을 키워보지 못한 사람이 김 사장의 속을 깊이 헤아릴 수 없음을 그네도 잘 알 것이었다. 다만 영화가 개봉하고 나선 아마도 지난 20여 년 간에 얽히고 설키어 묶혀놨던 대화와 애틋한 정감이 부자 사이에 오고 갔으리라 하는 생각만 짐작할 수 있었다.

식사가 끝나고 김 사장과 함께 포스코 사거리까지 걸어와서 서로 이별의 악수를 청했다. 사거리까지 나오는 사이 김 사장은 이탈리안 요리사로 변신에 성공한 그의 친구 얘기를 들려주면서 헤어질 장소로 향하는 동안 무료했던 발걸음의 무게를 덜어주었다.

“제 친구 중 하나가 삼성동에다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어요. 그 친구는 원래 요리에 관심이 많았지만, 부모 반대로 직장 생활을 하다가 부모가 사한 후에, 나이까지 지긋이 들어서 요리를 체계적으로 배우기 위해 유학까지 다녀온 후에 젊은 시절 오매불망 꿈꿨던 요리사가 되었어요. 삼성동에 낸 친구의 식당은 미식가들 사이에서도 이름이 꽤 알려져 있어요.”

이 이탈리아 식당의 이름을 김 사장은 두 번이나 거듭 일러줬건만, 이름이 생전 처음 들어보는 요상스런 외국어였고, 요즘은 기억력도 이전만 못한 탓에, 이름을 까먹어 상호를 전달할 수 없음을 친구 분과 독자들은 널리 혜량하여 주시기를...

“친구는 식당을 운영하는 것이 행복하다고 하나 친구의 와이프는 식당 운영을 매우 성가신 것으로 여기는지 모르겠어요. 이젠 나이도 꽤 먹은 지라, 젊은 시절 모아 놓은 돈을 적당히 쓰면서 편히 지내고 싶은 것이 친구 아내의 바램인 것 같아요.”

이쯤까지 얘기를 들었을 때 포스코 사거리에 당도했다. 김 사장은 그 근처에 있는 사무실에 잠시 볼일이 있었고, 동행한 이는 버스를 타러 코엑스 쪽으로 발길을 돌리면서 서로 다음 만남을 기약했다.

그날 만난 김 사장은 가까운 것에 관심을 갖고 묻고 남의 말에 답을 주며, 대개의 대화를 그렇게 이끌어 나갔다.

그가 들려준 이야기는 ‘잘 노는 방법’, ‘자식을 기르는 기쁨’, ‘새로운 길을 걷고 있는 친구이야기’.  이것 이외에도 아내의 존재 의미를 일러줬고, IT미디어에서 일하고 있는 주간이나 고참 기자들의 근황을 물어왔다.

그렇게 묻기를 좋아하고 가까운 말을 살피기 좋아했다는 것이, 까마득한 중국의 상고시대에 살았다는 순(舜) 임금이 사람을 대하는 지혜였고 보면, 사이베이스 김태영 사장도 거의 그쯤에 가까운 말들을 그날밤 조근조근 들려주고 있었다.

<데일리그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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