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르지 루카치가 1919년부터 1922년까지 헝가리 공산당에서 활동하면서 혁명 운동의 이론적 문제들에 관해 틈틈이 쓴 논문들을 모은 책이다. 이론적으로는 제2인터내셔널의 수정주의를 거부하고 마르크스주의를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의 혁명적 상황과 일치시켜 정통 마르크스주의를 옹호하려는 노력의 소산이었다.

지식을만드는지식이 펴낸 ≪역사와 계급의식≫은 제2인터내셔널의 수정주의와 기회주의에 맞서 마르크스주의의 혁명적 전통을 옹호하고자 하는 의도로 쓴 책이다. 그래서 루카치는 마르크스주의의 정통성을 변증법적 방법에서 찾는 동시에 변증법적 방법의 본질을 주체와 객체의 상호작용 내지 총체성의 관점에 두고 이것을 실현하는 주체를 프롤레타리아트로 설정한다.

이 책은 출간되자마자 격렬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지노비예프, 데보린, 루다스, 그리고 ≪프라우다≫, ≪적기≫ 등 당시 공산주의의 지도자들은 루카치의 입장이 수정주의이고 관념론이라고 호되게 공격했다. 이들은 주로 루카치가 자연변증법과 반영론을 부정했다는 점에 비판의 화살을 돌렸다. 다른 한편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루카치의 계급의식론이 레닌식의 전위당 독재를 합리화한다고 비난했다. 반면 블로흐, 레버이, 코르슈(Korsch) 등은 마르크스 변증법의 르네상스라 하며 환영했다.

≪역사와 계급의식≫이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에서 기여한 점으로는, 우선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헤겔 변증법을 복권시키고 헤겔과 마르크스의 연관 문제를 전면에 부각시켰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것은 루카치의 의도대로 수정주의 전통에 강력한 타격을 가하게 된다.

나아가서 이 책은 소외와 사물화의 문제를 마르크스 이래 처음으로 자본주의 비판의 핵심 문제로 취급했으며, 이후 좌파 사상가든 우파 사상가든 인간 소외의 문제를 시대의 핵심 문제로 인정하게 만들었다. 이와 같은 업적은 마르크스의 ≪경제학·철학 초고≫와 레닌의 ≪철학 노트≫가 1930년대 초에야 비로소 출간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해 볼 때 놀랄 만한 것이다.

또한 이 책은 사물화론을 통해 마르크스와 베버를 종합함으로써 근대 자본주의를 보는 두 패러다임 사이에서 생산적인 대화를 촉발했다. 마지막으로 마르크스주의 전통과 유럽의 사상 및 문화 전통을 독창적으로 결합함으로써, 당시까지만 해도 경제 이론 정도로만 통용되던 마르크스주의에 철학적 차원을 복원하고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유럽의 지성계에서 상당한 지위로 끌어올렸다.

지은이 죄르지 루카치(György Lukács, 1885~1971)는 20세기의 가장 탁월한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미학자, 문학 이론가의 한 사람이다.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서 부유한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유태계인 아버지는 아들이 금융업에 종사하길 바랐지만, 그는 이미 청소년 시절부터 자본주의적 삶을 깊이 혐오해 이런 바람에 심하게 반발했다. 부다페스트대학에서 아버지의 뜻을 따라 법학을 공부했지만, 그의 진정한 관심은 사회학과 철학, 특히 미학에 있었다. 1904년에 노동자 계급에게 현대극을 소개하려는 목적으로 ‘탈리아’라는 극단을 창설하기도 했다.

1906년부터 상당 기간 외국에서 유학했다. 1909년과 1910년에 베를린에서 지멜의 ‘개인적인 제자’가 되어 강의를 들었으며, 1913년에서 1917년까지는 하이델베르크에서 ‘베버 서클’에 속해 있었다. 특히 베버와는 각별한 교분을 나누었다. 철학적으로는 주로 리케르트, 빈델반트, 라스크 등의 신칸트주의에 영향을 받다가 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점차 헤겔과 마르크스로 기울었다.

1918년 12월에 헝가리에서 결성된 공산당에 입당했다. 1919년 3월에는 헝가리 소비에트 공화국이 선포되었는데, 루카치는 이 정부에서 교육 및 문화 부인민위원이 되어 교육과 문화의 재편성을 위한 광범위한 프로그램을 짰다. 헝가리 소비에트 공화국이 133일 만에 무너지자 빈으로 망명해 1929년까지 머물렀다. 1928년에는 다음 해에 열릴 헝가리 공산당 대회에 제출하기 위한 정치 논문들을 작성했다. 이 논문들은 그의 가명을 따서 ‘블룸 테제(Blum-Thesen)’라고 불린다.

1930년에 빈에서 추방되어 모스크바에 머물다가 1931년에 베를린으로 갔다. 1933년 나치가 권력을 장악한 뒤 1934년에 소련에 가서 1944년까지 머물렀다. 1933년과 1934년에 ≪역사와 계급의식≫에 대해 자아비판을 하고 이후 미학과 문학사 연구에 몰두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1945년에 헝가리로 돌아왔다. 부다페스트대학의 미학과 문화철학 교수가 되었고 헝가리 의회의 의원으로 선출되었지만 공산당 내부의 요직은 차지하지 못했다. 1956년에 헝가리 봉기로 들어선 너지(Nagy) 정부에 문화부장관으로 입각했지만, 너지 정부가 바르샤바 동맹에서 탈퇴한 데 반대해 물러났다. 소련군의 탄압으로 봉기는 실패하고 루카치는 루마니아로 추방되었지만, 1957년 4월에 부다페스트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때부터 일체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오로지 미학과 철학 연구에만 몰두하면서 마지막까지 저술 활동을 하다가 1971년 6월에 세상을 떠났다.

임영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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