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孝)와 충(忠)

  인간 사랑의 정신을 실천하는 것은 부모에게 효도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효(孝)가 백 가지 행실에 근본이 되기 때문에 그와 같이 말한다. 효(孝)자에는 아들이 늙은 부모를 받든다는 의미가 있다. 공자(孔子)는 “효도가 덕(德)의 시작이다.”라고 했고(《공자가어》), 제갈량은 “인간사랑은 부모사랑에서부터 시작한다.”고 하였다.《제갈량집》 부모에게 효도할 줄 알면 남에게 덕을 베푸는 일도 잘 하기 때문에 효도를 덕행의 기준으로 삼은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부모에게 효도하는 사람은 나라에 충성도 잘한다. 그래서 예로부터 임금이 충신을 구할 때는 반드시 효자의 가문에서 찾은 것이다. 《효경》에 “군자가 부모를 섬기는 데 효도하므로 그것을 임금에게 충성으로 옮길 수 있다[君子之事親孝, 故忠可移於君].”고 했으니, 이는 고금에 통하는 진리와 같은 말이다. 이순신은 부모에게 도리를 다하는 극진한 효자였기에 나라를 위한 일에도 항상 한결같은 충정(忠情)으로 임할 수 있었다.

  이순신이 쓴 《난중일기》를 보면, 임진년 새해 첫날의 일기에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적은 내용으로 시작한다. 이 때 어머니에 대한 표현을 “어미 모[母]”자를 쓰지 않고 “천지[天只]”라고 했다. 천지는 《시경(詩經)》 〈용풍(鄘風)〉 〈백주(柏舟)〉편의 “어머니는 하늘이시다[母也天只].”라고 한데서 나온 말인데, 자신에게 있어서는 어머니가 하늘과 같은 존재였기 때문에 그런 표현을 쓴 것이다.

  이순신은 전란 중에 아산에 홀로 계신 78세 된 홀어머니의 안부가 늘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항상 사자(使者)를 아산에 보내어 대신 문후를 드리게 했다. 심부름은 주로 아들과 조카, 부하들이 하였다. 계사년 5월 4일자에 “오늘은 어머니의 생신인데, 전쟁 때문에 장수를 비는 술잔[獻壽]을 올리지 못한 것이 평생의 한이 되겠다.”고 하였다. 전쟁의 장기화로 언제 끝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결국 어머니를 본영과 가까운 전남 여수 송현(松峴) 마을[현 웅천동 1420-1번지]에 있는 부하장수 정대수(丁大水)의 집으로 모셔왔다. 어머니는 정유년 4월 사망하기 전까지 이곳에 기거하였다.

  이순신은 작전하는 와중에도 수시로 어머니에게 찾아가 안부를 확인하였다. 심지어 하루는 아침에 흰 머리카락을 모두 뽑아 버렸다. 그 이유는 늙으신 어머님이 살아계신데 자식이 늙은 모습을 보이는 것만도 죄가 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갑오년 정월 11일 어머니를 뵈었을 때 숨을 가쁘게 쉬는 모습을 보고 살아 계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이순신은 그저 감춰진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그것도 잠시 왜적을 토벌할 일로 오래 머물 수 없었다.

   이튿날 아침식사 후 어머니께 하직을 고하니, 어머니는 “잘 가거라. 부디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야 한다[大雪國辱].”고 재삼 당부하고, 아들이 떠나가는 모습을 보고 조금도 아쉬워하지 않았다. 훌륭한 장수를 자식으로 둔 어머니다운 모습이다. 어머니의 이 당부말씀이 이순신에게는 항상 국난극복을 이루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어머니의 말씀을 따른 것이 효도이자 충성을 한 것이니 결국 도덕의 이상인 충효쌍수(忠孝雙修)를 이루어 낸 것이다.

   글: 노승석 이순신 전문연구가(교감완역 난중일기, 이순신의 승리비결 저자)

노승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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