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의 의미

   지금으로부터 15년 전 필자는 고전을 연구하는 학도로서 늘 주경야독(晝耕夜讀)하는 생활을 해야 했다. 대학원의 논문 연구를 위해 새로운 문헌을 발굴해야겠다는 열의로 한국과 중국의 수많은 전적들을 찾아가며 연구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때는 고전문헌이 대규모로 DB화 되지 않은 상태라서 지금처럼 고전 검색이 보편화되지는 못했다. 그래서 난해한 용어나 자료를 찾으려면 항상 관련 책자들을 일일이 찾아봐야 했다.

   그때 다행히 중국에서 들여온 26사(史)와 사고전서(四庫全書) 같은 방대한 공구서들은 고전연구에 친절한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 이는 인문학 연구에 있어 필수적인 자료였지만, 이것으로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때면 그야말로 난제 중의 난제였다. 한국의 문집 총간도 DB화 되기 시작하여 많은 도움이 되었지만, 역시 전문 용어를 찾는데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필자의 고전연구는 이러한 가운데서 시작되었다.

   그후 고전문헌에 대한 상당한 정보를 확보한 후 어느 정도 자신을 갖게 되었다. 이때 초서로 작성된 《난중일기》해독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여러 가지 여건상의 문제로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그 당시 필자가 처음으로 발굴한 내용 중에는 그 당시 고전 DB에 나오지 않아 책자에서 일일이 찾은 사례들이 꽤 있었다. 예로, “내산월(萊山月)(인명)”과 “일맥금전변반혼(一陌金餞便返魂)(시구)”과 같은 경우다. 내산월이란 명칭은 기존에는 세산월(歲山月)로 오독 되어 있어서 해 세(歲)자를 쑥 래(萊)자로 해독하고 출전을 밝히기 까지가 어려운 작업이었다. 일맥금전변반혼은 그때 당시 수많은 고전자료에서 쉽게 확인되지 않았는데, 우연히 명나라 구우(瞿佑)의 《전등신화(剪燈新話)》원전을 완독하다가 발견한 시구이다. 오랜 시간과 노력이 들었다.

   이러한 방법으로 10여 년 동안 《난중일기》를 연구해왔다. 그간의 성과를 정리해보면, 대략 2백 여 곳을 교감(校勘)한 내용이 주요한 점이고, 특히 이본으로서 《태촌집》의 난중일기를 합본한 점, 《충무공유사》를 완역하여 보유한 점, 그리고 1916년 조선연구회의 주간인 아요야 나기 난메이(靑柳南冥)의 일본판《난중일기》와 1955년 간행한 홍기문의《난중일기》한글본, 이순신이 인용한 나관중의《삼국지통속연의(三國志通俗演義)》내용과 금토패문 전문을 찾아낸 점 등이다.

   21세기 정보화시대에서 한 개인의 연구 내용들은 대중들에게 공유하도록 널리 알리고 인용하도록 권장해야 한다. 그것이 후대에 이순신의 정신을 올바로 알리는데 부합하기 때문이다. 이순신에 대한 세인들의 관심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와 명량 영화 이후 더욱 증폭되었다. 이른 바 이순신열풍에 편승하여 이순신관련 서적들이 봇물을 이루게 되었는데, 고전이나 초서를 전공하지 않은 비전문가들도 이순신관련 서적을 많이 집필하게 되었다. 특히 필자의 연구물 인용이 많은 것을 보면 매우 반가운 일인데, 간혹 우려되는 일도 있다. 선행 연구자의 업적을 누락시키거나 잘된 내용을 잘못된 것으로 간주하여 혼란을 초래하는 경우다. 이른 바 득어망전(得魚忘筌)이니, 집필하는데 있어서 더욱 세심한 주의가 요망된다.

   필자가 《난중일기》초고본과 이본(전서본, 난중일기초, 후대이본 등) 상황을 정리하여 최근에 《교감원문 난중일기》(원문책자)를 만들었고, 이것을 토대로 해석한 번역본《교감완역 난중일기》를 간행하였다. 새로운 원문에는 난중일기의 상황을 누구나 쉽게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하였다. 이 역시 번역본과 함께 네 차례 개정을 거친 것이다. 특히 새로운 교감 내용은 다소 생경할 수도 있겠으나 이미 오래전에 학계의 최고 고전전문가들에게 검증을 받은 바 있다.

  4월 달은 봄을 알리는 꽃소식과 함께 우리 민족의 성웅이신 이충무공의 탄신일이 있는 달이다. 우리 국민들은 경건한 자세로 임해야 하는데, 이순신의 충혼을 되새기며 모두가 이순신이 걸었던 올바른 길로 나아가야할 것이다. 역사의 뒤안길에서 그분과 같이 호흡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그분의 숭고한 정신을 몸소 실천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글: 노승석 이순신연구가(교감완역 난중일기 저자)

 

노승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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