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즉생必死則生

  성패를 가늠하기 어려운 한계 상황에 놓이게 되면 많은 이들이 좌절하게 된다. 그러나 침착하게 사세를 관망하며 결사적인 자세로 노력하면 최악의 상황을 역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실패한 원인을 진단하고 주어진 기회와 상황을 잘 이용하여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전략을 잘 짜야 한다. 죽기를 각오한 자세로 성공에 대한 자신감을 가질 때 반드시 목적을 이룰 것이다.

  정유년 7월 16일 원균이 칠천량에서 패망한 뒤, 8월 3일에 이순신이 복직되었다. 9일 전라지역을 순찰했는데, 몰려온 사람이 120여 명이었다. 이때 배설이 도주할 때 끌고 갔던 전선 10여 척을 인계한다. 녹도선 1척도 수습했다. 그 후 15일 식후 보성 열선루에서 선전관 박천봉을 통해 선조의 수군폐지 명령서를 받았다. 이에 이순신은 12척의 전선으로 싸울 수있다고 상소하였다.

   16일 일본 장수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는 5만 병력으로 남원성을 함락한 뒤 수륙병진작전으로 서해를 경유하여 북상할 계획을 세운다. 이틀 뒤 이순신이 전라우수사 김억추에게 전선을 수습하게 하고, 여러 장수들에게 배를 거북선 모양으로 꾸며 군세를 돕게 한다. 26일 늦은 시간에 김억추가 왔는데 이때 가져온 배가 형편이 없었다. 이때 수군의 전선이 12척에서 13척이 된다.

  9월 7일 신시에 도도 다카도라藤堂高虎부대의 왜선 13척이 출몰했는데, 이들은 조류가 험한 명량鳴梁을 대선을 중선으로 바꾸어 타고 통과하기로 한다. 14일 왜선 55척이 어란 앞바다에 침입하였고, 조선 수군들을 섬멸한 뒤 한강으로 올라간다는 정보가 있었다. 이순신은 적은 전선으로 많은 적과 넓은 바다에서 싸우는 게 불리하므로 좁은 명량 부근을 교전지로 선택한다. 다음날 물살이 거센 명량에 진을 칠 수 없어 우수영 앞바다에 진을 쳤다. 여기서 부하들에게 결사적으로 싸워줄 것을 당부하였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약속하기를, “병법에 이르기를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반드시 살고자 하면 죽는다.’고 하였고, 또 ‘한 사나이가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고 했는데, 이는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김이 있다면, 즉시 군율을 적용하여 조금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고 재삼 엄중히 약속했다.
招集諸將 約束曰 兵法云 必死則生 必生則死 又曰 一夫當逕 足懼千夫 今我之謂矣 爾各諸將 少有違令 則卽當軍律 小不可饒貸 再三嚴約     -《난중일기》 정유년 9월 15일 -
 

16일 이른 아침 이순신의 전선 13척이 우수영 앞바다에서 왜선 133척에 포위되었다. 조수는 동남쪽으로 빠르게 흘러 수군에게 유리했다. 김응함과 안위의 전선 2척이 돌진하면서 총공세가 시작되고, 이순신이 발포하며 돌진하자 송여종 등이 협공하였다. 이때 왜장 마다시馬多時의 시체를 토막내자 왜군의 기세가 크게 꺾였다. 수군이 포격전을 벌여 왜선 31척을 분멸하자 남은 왜선들은 후퇴하였다. 이로써 왜군의 서해진출을 차단하고 무너진 수군을 재건하였다. 이 모두 이순신이 남다른 지휘력과 임기응변의 전술을 구사한 결과이다.

   정유년 9월 16일 이른 아침에 이순신이 명량해전을 치렀다. 이때의 연월일시를 《주역》으로 풀면 본괘는 화지진火地晉괘이고 변괘는 화산려火山旅괘이다. 체괘는 곤토이고 용괘는 이화이다. 체호괘는 간토 이고 용호괘는 감수 이고 변괘는 간토 이다. 용괘가 돕는 강한 체호괘인 간토가 용호괘인 감수를 극하니 역시 범이 돼지를 잡는 상이고, 변괘인 곤토가 괘기를 더하니 토석이 강해져 기반을 더욱 견고하게 하는 상이다. 처음엔 부하들이 겁에 질려 후퇴하려 했지만, 이순신이 선두에서 더욱 분전하도록 독려했다. 그리고 직접 적진으로 돌진하여 대포를 발사하고 부하들이 협공한 결과 막강한 전투력을 발휘함으로써 승리하게 된 것이다.

    글 : 노승석 이순신 연구가(교감완역 난중일기 저자)

노승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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