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심(初心)

이순신이 문과 시험을 준비한 기간을 무예를 배우기 시작한 21세 이전까지로 본다면, 그가 수학한 기간은 최소한 10년 이상이 될 것이다. 그가 다년간 쌓은 학문적인 실력은 32세 때 치른 무과시험장에서 드러났다. 무과시에서 《소서(素書)》를 강(講)했는데 시험관이 “장량이 신선인 적송자(赤松子)를 따라갔으니 죽지 않은 것인가?”라고 묻자, 이순신은, “《통감강목》에 ‘임자 6년 장량이 졸했다.’고 했으니, 어찌 죽지 않았을 리가 있겠습니까.”라고 답하였다. 그러자 시험관들은 “이것이 어찌 무인이 알 수 있는 것인가.”라고 감탄하였다.

이순신의 정신은 어려서부터 배운 유학(儒學)에 의해 형성되었다. 이순신이 보통의 무인이 알기 어려운《통감강목》의 내용을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만 봐도 평소에 남다른 문인적인 소양을 쌓았음을 알 수 있다. 필자는 오래전 성균관 한림원에서 《통감》을 강의했었는데, 《통감》은 유학에서 초학자가 배우는 기초과목이다. 이순신의 인생관도 역시 이러한 학문적인 바탕위에서 형성된 것이다.

현대사회는 도덕추구보다는 물질적인 이윤추구로 개인주의가 팽배해지는 경향이 강하다. 인정이 메말라가고 가고 있는 현실 속에서 국가와 사회 공동체의 발전을 위해서는 이기심을 버리고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신의 분수를 알며 주어진 현실에 순응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순신은 과거에 급제한 뒤 사회에 나아가기 전 초심자로서 다음과 같은 자신의 소신을 드러내었다.

 

장부가 세상에 나서 쓰이면 충성으로 목숨을 바칠 것이요, 쓰이지 못하면 초야에서 농사짓고 사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다.[丈夫生世, 用則効死以忠, 不用則耕野足矣] 권세 있는 이에게 아첨하여 영화를 훔치는 일은 내가 매우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다. - 《충무공행장》 -

이 말은 이순신에게는 좌우명과도 같은 것이다. 윤휴는 이에 대해 “벼슬할 때부터 대장이 될 때까지 항상 이 뜻을 굳게 지켰다.”고 하였다. 벼슬에 나가게 되면 열심히 일할 것이지만 그렇게 되지 못하더라도 결코 불평하지 않고 안분지족하며 살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또한 권력자에게 아부하여 한 때의 부귀를 얻는 행위를 수치로 여겼다. 이는 공자(孔子)가 말한 “의롭지 못한 부귀는 나에게는 뜬구름과 같다[不義而富且貴, 於我如浮雲].”고 한 말(《논어》〈술이〉)과도 의미가 통한다.

이순신은 정유재란 시기에 기요마사의 부하 요시라의 간계와 원균의 모함으로 삭탈관직을 당하고 백의종군중에 모친상을 당한 최악의 상황에서도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끌어 무너진 수군을 재건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기까지 이순신은 《난중일기》〈독송사〉에서 “신하 된 자가 임금을 섬김에는 죽음만이 있고 다른 길은 없다[人臣事君, 有死無貳]”고 밝힌 것처럼, 한결같은 초심(初心)을 가지고 자신을 죽이려한 선조를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신하의 직분을 다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중국 주초(周初)의 정치가 강태공이 “한 사람이 두 마음을 가지면 그 내부가 반드시 쇠망한다.”고 했듯이 항상 한결같은 신념으로 대의(大義)를 실천해 나가는 것이 사회와 국가가 발전하는 데 원동력이 될 것이다.

 

글: 노승석 여해고전연구소장/이순신 연구가(교감완역 난중일기 저자)

 

 

노승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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