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심어 : 이순신 난중일기 인문학 고전전문가 요즘 인문학계에는 문학과 사학, 철학 등 각 분야의 많은 전공자들이 꾸준히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한문으로 된 원전을 제대로 번역할 수 있는 전공자는 그다지 많지가 않다고 한다. 이 문사철을 기반으로 하는 인문학적 지식에 원전 해독 능력까지 구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랫동안 한문 고전을 배우고 고전 현대화의 필수조건인 현대국어 이론도 배워야 한다. 결국 한 명의 인문학자가 고전번역을 할 수 있기까지에는 수십 년의 세월을 투자해야 한다. 한문 고전을 사전 없이
인간사회에서 경험지식이란 예기치 않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항상 필요하다. 여기서 경험이란 삶에 도움이 될 정도의 체험수준을 말한다. 그래서 인간사의 경험지식은 항상 삶에 유익하다고 말한다. 중국 한(漢)나라 선제(宣帝) 때의 명신 소광(疏廣)은 “한 가지 일을 경험하지 않으면 한 가지 지혜가 생기지 않는다[不經一事, 不長一智].”고 하였다. 이는 지혜를 터득하기 위해서는 항상 일상에서의 경험이 중요함을 말한 것이다. 충무공 이순신은 전란 속에서 지혜를 터득하기 위한 노력을 끊임없이 하였다. 그는 전쟁을 준비하는 진중(陣中)의 공간
이순신의 문집인 《이충무공전서》가 1795년 처음 간행된 이후 6간 되기까지 선인들의 끊임없는 노력이 있었다. 여기서 특히 주목할 점은 이에 앞서 1707년(숙종 33년)에 이순신의 현손인 이홍의(李弘毅)가 이순신의 유고와 관련 기록들을 모아 《충무공가승(忠武公家乘)》을 간행한 것과 이것이《이충무공전서》의 저본(底本)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해서는 10여 년 필자가 밝히기 전만해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이 두 책의 목차를 서로 비교해 보면, 전서의 윤음(綸音)․비명(碑銘), 권수(卷首) 교유(敎諭)․사제문(賜祭文)․도설(
《난중일기》는 이순신이 7년간의 전쟁을 치르면서 작성한 전쟁에 관한 일기이다. 여기에는 이순신의 구체적인 활약상은 물론, 수차례의 해전 상황과 진영의 상황, 공사간(公私間)의 인사문제와 당시의 사회상 등 다양한 내용들이 망라되어 있다. 이것이 한 개인의 일기이지만, 임진왜란과 관련된 많은 내용들이 수록되어 있으므로, 《난중일기》를 임진왜란의 사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더욱이 《난중일기》는 우리 역사에서 대표적인 위인으로 손꼽히는 이순신이란 인물이 작성한 일기이기 때문에 그를 향한 숭배의식과 함께 이에 대한 관심이 갈수록 증
이순신이 임진왜란 중에 7년 동안 오고간 유적지는 이루다 헤아릴 수 없을만큼 매우 많다. 그중에서 《난중일기》에 나오는 대표적인 유적지를 손꼽아보면 대략 5∼6백 여 곳이 되는데, 특히 정유년에 백의종군을 하면서 지나간 곳은 역사적으로도 매우 의미가 크기 때문에 최근에는 해당 지자체의 노력으로 고증을 통해 각 구간에 지표를 세우기도 했다. 최근에 필자는 고지도와 관련 사료를 분석한 뒤 이순신의 백의종군로를 수차례 탐방해 보았다. 그러나 오늘날의 지번으로 4백 여년 전의 지형을 찾는다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처럼 막연한 일이라는 생
어떤 일이든지 처음 시작할 때는 좋은 성과를 내기 위해 철저한 계획과 구상을 해야 한다. 처음 시작할 때의 먹은 마음을 초심(初心)이라고 한다. 이 초심은 자신의 가치관과 목표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일찍이 공자는 “나의 도는 하나로 관철되어 있다[吾道一以貫之].”고 하였는데(《논어》〈이인〉), 그 하나란 절대 불멸의 진리로서 인(仁)을 말한다. 이 인은
현대사회에서 원만한 인간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항상 공명정대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요즘은 대부분 개인의 이익추구가 삶의 수단이 되어 가고 있지만, 그래도 인사에 저해가 되는 과욕과 허욕은 항상 경계해야 한다. 공자는 “이득을 보면 의로운 것인지를 생각하라[見利思義].”고 하였다(《논어》〈헌문〉). 자신부터 부당한 욕심을 낸다면 주변에서 원성을 사게 되어
인간사회에서 인간의 인성과 도덕에 대한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항상 중요시되어 왔다. 그때마다 유학(儒學)에서 제시하는 덕목이 절대적인 가치의 기준이 되었고, 진리 추구를 위한 심성수양이 인간생활의 보편적인 방편이 되었다. 옛 위인들이 위대했던 이유도 항상 심성수양을 통한 올바른 삶을 살았기 때문이니, 인간사회에 밑바탕이 되는 인성교육은 끊임없이 추구되어야
《난중일기(亂中日記)》의 최초 전사본(傳寫本)으로는 1693년(숙종 19) 이후 미상인에 의해 작성된 《충무공유사》에 들어 있는 〈일기초日記抄〉를 들 수 있다. 여기에는 기존 《난중일기》에 없는 32일치를 포함하여 총 325일치의 분량이 들어있고, 첨지(籤紙)를 붙여 적은 일종의 교감형태로 적은 글자들도 있다. 이은상이 처음으로 이를 인용하여 무술일기의 일
주변인과의 긴밀한 협력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데 관건이 된다. 공동의 협력에서 나온 힘은 한 개인이 주도하는 것보다 몇 배의 추진력이 있다. 때문에 공동체 결속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서로에 대한 배려와 양보로써 의리를 베풀어야 한다. 그러면 상대가 감동하여 더욱 협조할 것이다. 개인의 이익을 뒤로 한 채 항상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상호 결점을 보완하여 노
고전번역에서 초서체로 된 고문헌을 해독하는 일이 가장 어렵다. 글자형태만 보고 섣불리 판단하면 오판할 수 있기 때문에, 항상 용례와 전후의 문맥을 잘 따져봐야 한다. 그래서 초서해독의 지침인 “문팔초이(文八草二)”라는 말이 생겼는데, 이는 글씨 형태보다는 문리력에 더 비중을 둔다는 뜻이다. 요즘은 이러한 문리력이 없는 일반인들도 고전관련 웹 DB정보를 통해
이순신이 무과 출신임에도 전란 중에 《난중일기》라는 불후의 역작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어려서부터 문인적인 소양을 충실히 쌓아 문과 출신 이상의 비범한 문재(文才)를 겸비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난해한 초서(草書)로 작성한다는 것은 일반 장수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난중일기》를 거침없이 흘려 써내려간 필치에서 나타나는 문체와 필체의 특징을 통해 이순신의 남
옛날에는 전쟁할 때 대장이하 장수가 작전에 필요한 명령을 전달하는 수단으로 기(旗)를 사용하였다. 기는 명령의 성격과 상황에 따라서 용도가 다르고 종류도 다양하다. 임진왜란 때 조선 수군은 훈련규정에 따라서 다양한 기를 사용했다. 보통 군사훈련 시에는 대장이 진영의 선문(船門) 밖에 도착하면 대장이 도착했다는 의미로 선상에 대장기(大將旗)를 세우고 대포를
이순신이 문과 시험을 준비한 기간을 무예를 배우기 시작한 21세 이전까지로 본다면, 그가 수학한 기간은 최소한 10년 이상이 될 것이다. 그가 다년간 쌓은 학문적인 실력은 32세 때 치른 무과시험장에서 드러났다. 무과시에서 《소서(素書)》를 강(講)했는데 시험관이 “장량이 신선인 적송자(赤松子)를 따라갔으니 죽지 않은 것인가?”라고 묻자, 이순신은, “《통
평소에 주변인들과 항상 친분을 쌓아서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좋다. 남다른 관심과 배려로 상대를 대하면 그도 우호적으로 대할 것이다. 이러한 관계를 유지하여 서로 화합하게 되면 조난 시에 쉽게 협조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렇게 되기까지는 각별한 성의를 보이는 노력이 필요하다. 평소에 주변인들과 친분을 쌓기 위해 작은 성의를 담은 선물을 보내주
이순신이 쓴 《난중일기》에는 일기 이외에도 잡문 형태의 글들이 많이 실려 있다. 갑오년 11월 28일 이후 기록 중에는 중국 명초(明初)의 소설가 나관중(羅貫中)의 《삼국지통속연의(三國志通俗演義)》에서 인용한 여러 구절들이 있다. 이는 필자가 밝혀내기 전까지만 해도 그 정확한 출처를 전혀 모르고 그저 이순신이 지은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 이 중에 특히 “난
고전번역에서 초서체로 된 고문헌을 해독하는 일이 가장 어렵다. 자칫 글자형태만을 보고 섣불리 판단하면 오판할 수 있으므로, 항상 용례와 전후의 문맥을 잘 따져봐야 한다. 이를 뒷받침 하는 것이 바로 고전해독에 관건인 문리력이다. 그래서 나온 말이 “문팔초이(文八草二)”인데, 이는 초서 글씨 형태보다는 문리력에 더 비중을 둔다는 의미이다. 마치 암호문과도 같
이순신은 전쟁 중 진영에 있을 때 항상 혼자 사색하며 자신을 성찰하고 미래를 준비하였다. 그래서 《난중일기》에는 “혼자 앉아 있었다[獨坐]”는 말이 많이 나온다. 항상 인격수양하는 자세로 생활한 것인데, 그가 추구한 것은 일상에서는 인륜의 도리이고, 전쟁에서는 승리하는 전략이었다. 일찍이 병서(兵書)를 탐독하여 전쟁 중에는 교훈이 되는 내용들을 일기에 옮겨
《난중일기》1597년 5월 21일자에 “죽을죄도 아닌데 누차 형장을 맞아 거의 죽게 되었다가 물건을 바치고서야 석방 되었다. 안팎이 모두 바치는 물건의 많고 적음에 따라 죄의 경중을 정한다. 이것이 이른 바 ‘백전(百錢)의 돈으로 죽은 혼을 살린다[一陌金餞便返魂].’는 것이다”라는 내용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이 관아에 바치는 물건의 많고 적음에 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