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대적인 아픔을 오직 갈망과 대항으로 극복코자 했던 유관순은 우리시대의 진정한 '잔다르크'다. -

▲ 유관순 수형카드[문화재청 제공]

정부는 3.1 운동 100주년을 맞아 유관순 열사에 대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가 서훈을 의결하여 그동안 3등급이었던 기존 독립장을 최고등급인 '대한민국장'으로 격상했다.

​그 동안 유관순 열사에 대해 내려진 3등급인 '건국훈장 독립장'이 공적을 평가할 때 훈격이 너무 낮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돼왔다.

유관순 열사는 이화학당 재학 중인 1919년 3월 5일 서울 남대문 독립만세 운동에 참여했고, 이어 4월 1일 충남 천안시 병천면 아우내 장터의 독립만세 운동을 주도하다가 일제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이후 일제의 모진 고문으로 1920년 18세 꽃다운 나이로 옥중에서 순국했다. 정부는 열사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유관순 열사는 광복 이후, 3·1운동과 독립운동의 상징으로서 전 국민에게 독립정신을 일깨워 국민통합과 애국심 함양에 기여했고, 비폭력·평화·민주·인권의 가치를 드높여 대한민국의 기초를 공고히 하는 데 기여했다.

독립운동 역사를 기억하고 독립운동가를 예우하는 것은 우리의 자랑스러운 역사이고,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게 된 뿌리다.

유관순 열사의 독립운동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는 가운데 기억할수는 없지만 그시대 보통 사람들의 모습과 용기를 통해 작금의 현실 우리들에게 희망을 안겨주고자 한 작품 '항거: 유관순 이야기'가 스크린을 통해 생생하게 전달됐다.

영화는 치욕스런 지난 역사에 대한 올바른 고찰과 후손들인 우리들이 결코 잊어서는 안될 역사적인 순간을 스크린에 투영했다는 그 자체만으로 큰 감동을 자아낸다.

당당하게 외칠수 있는 대한독립만세를 마음껏 내지를수 있는 지금의 현실이 얼마나 감동적인지 한번쯤 되새기며 유관순은 시대적인 아픔을 오직 갈망과 대항으로 극복코자 했던 우리시대의 진정한 '잔다르크'다.

여성 독립 운동가에 대한 조명으로 그동안 일부 기관, 단체를 제외하고서는 여성 독립 운동가에 대한 연구나 수집, 여정을 알아보고자 하는 경우는 적었다.

영화 '항거: 유관순 이야기'는 1919년 3.1운동이 전개된 후 그 과정에서 붙잡힌 17세의 어린 유관순과,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되어 있던 여성 독립 운동가에 대한 1년을 그렸다.

영화는 고증을 통해서 다큐멘터리에서나 볼 수 있었던 내용을 담고 있으며 흑백 영상을 이용함으로써 고통의 많은 부분을 줄였다.

실제로 감옥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 많은 불편함을 준다. 그렇지 않아도 불편한 공간 안에 외지(일본)인이 들어앉아 무고한 이들을 가둬놓는다면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인권 탄압은 불보듯 뻔하다.

당시 유관순이 입소해 감옥 문 앞에서 놀란 데에는 인권의 말살을 또 다시 목도했기 때문일 것이다.

숨쉬기도 힘든 3평도 안 되는 공간에 여러명이 갇혀 제대로 앉지도 못하고 서서 자신을 살리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과 폭력에 따른 고문과 간섭, 성적 유린까지¨ 매일이 찾아오는 것에 원망과 한이 서릴 것이다.

숨이 막힐 듯이 좁은 공간에 갇힌 그들도 직업과 나이는 제각각이고 눈 앞에서 가족이 죽은 이들도 다수일 것이며, 각기 다른 형무소에 갇혀 고문을 당하고 있을 이들이 태반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고통 속에서도 살아야 하기에 서로의 어깨를 부딪히며 밤낮으로 걸음을 옮기고, 한 사람에게서 나지막이 흘러나온 노랫말은 좁은 감옥에서의 생활을 조금이나마 견딜 수 있게 한다.

하지만 이 노랫말조차도 마음껏 내지르지 못하는 곳이 이곳이고, 먼저 주도한 사람에게 말못할 형벌이 따르는 곳도 이 지옥 같은 곳이다.

그래도 조국의 해방을 이루겠다고 몇 겹의 고문을 몸으로 힘겹게 받아내며 악으로 깡으로 안 아픈 척 서로를 보면서 이길 수 없는 싸움을 계속해 나가야만 스스로를 살아낼 수 있었던 공간이 이 잘못된 곳이다.

특히 유관순은 어린 나이에도 굳은 신념으로 어른들을 압도했다. 교육과 믿음의 힘을 올바른 가치에 온전히 쏟아 부었다.

그 무서운 시련을 어찌 다 감당했을까 생각해 본다면 그저 나라를 잃고서는 한시라도 살지 못하겠다는 열성이 아니었을까 싶다.

모진 고문으로 손톱이 다 빠지고 뼈가 뒤틀리고 피가 터져 나오는 고통 속에서도 눈빛은 매섭게 살아 있고, 그조차도 안 되면 있는 힘껏 마주 다문 이(齒)로라도 저항하며 일제의 만행과 지배 속에서 살기 싫었다.

당시 일본은 대한민국의 정기를 끊어 놓겠다고 우리나라 전국 거리와 산에 쇠말뚝을 박아넣었고, 한국 여인들에게서 태어날 더러운 피와 인간들이 역겹다고 윤간을 한 후 폭력을 써서 일부 장기(臟器)를 못쓰게 만들었다.

유관순을 비롯해 독립을 외쳤던 많은 이들이 살이 뚫리고 뼈가 부러져 그 자리에서, 또는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다음은 영화 '항거: 유관순 이야기'의 줄거리다.

유관순과 함께 수감 생활을 했던 8호실에는 유관순 외 6명(심명철, 어윤희, 권애라, 신관빈, 임명애, 김향화)의 독립 운동가가 있었고, 4명은 개성에서 독립 운동을 주도하거나 참여한 인물로, 권애라는 이화학당 출신으로 유관순의 선배이다.

파주 교하리에서 독립 운동을 전개한 임명애와 수원에서 전개한 기생 출신의 김향화 인물이 작품에 등장한다.

임신한 인물이 등장하여 애잔한 느낌을 주는데, 실제로 임명애는 출산 때문에 보석으로 풀려났다가 신생아를 안고 재수감되었다고 한다. 남편도 독립 운동으로 수감되어 있었기에 갖난 아기를 옥사로 데리고 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또한 기독교와 관련한 대사가 세 차례 정도 짧게 등장하는데 유관순을 비롯하여 독립 운동가 다수의 인물이 외국인 선교사를 통해 기독교인으로서 생활을 하고 있던 당시였기 때문이다.

19세기 후반 동학농민운동의 전개도 동학(천도교)에 의해 발생하고 규모가 커진 것처럼, 이후 천도교, 불교, 기독교 외 종교인의 노력이 독립 선언서를 선포하거나 그 선언서를 복사하고 배포하는 일에 기여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작품에서 등장한 이러한 대사가 아마도 어떠한 다른 의도를 갖고 포함된 게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고 싶다.

그곳이 형무소가 아니었다면, 그곳에 가해자와 피해자가 없었다면, 푸르고 맑은 하늘은 더없이 평온하게 그 자리를 비추었을 것이고, 맑은 날의 장면을 바라보는 관객은 작품을 통해 여유를 느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당시 고1이었던 유관순. 병천 출신의 그녀는 서울에서 공부를 하다가 1919년 3월 1일에 있었던 만세운동을 전하면서 고향인 병천에서 운동을 다함께 하자고 내려왔다.

영화속세서 그려진 유관순은 밥먹기 전에 식전기도를 하는 기독교 집안이고 본인도 기독교 신자이지만 기도 중에 밥을 먼저 한숟가락 뜨기도 하고, 벌레를 무서워하는 오빠 대신 벌레를 내쳐주기도 하는 티없이 맑은 꿈 많은 여느 소녀와 다름 없는 모습을 보여줬다.

어느날 일본순사가 관순의 집에 순찰을 하러 들어오고 아버지와 오빠가 호통을 치는 사이 유관순은 독립태극기와 독립선언문을 들고 뒷담을 넘어 빠져나와 병천에서 4월 1일에 만세운동을 주동하다 서대문감옥에 갇힌다.

3년형을 받고 여자교도소 8번방에 들어와보니 좁은 감방 안에는 25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가만히 서 있으면 발이 퉁퉁 부어서, 그 좁은 방에서 다함께 강강술래를 하듯 빙글빙글 돈다.

이 방에는 고향에서 알던 아주머니도 있고 서울에서 알던 선배도 있고 화류계 출신이라지만 깨어있는 독립운동가 향화언니도 있다.

빙빙 돌다가 누군가 아리랑을 부르자 다함께 부르는데 간수가 와서 조용히 하라고 째려보니 합죽이 이옥이가 울다가 누가 오면 뚝 그친다며 우리가 개구리같다고 하자 이번엔 아리랑 대신 개굴개굴 소리를 다함께 낸다.

이에 열받은 간수와 소장은 조선인이지만 직업이 필요하고 해서 간수로 일하러 들어온 니시다에게 일본말로 우리는 개구리가 아니라고 유창하게 할 수 있는 개구리 주동자를 찾아내라고 한다.

일본말로 지시했을 때 곧바로 따르는 이옥이가 걸리자 관순도 나서고 다행히도 다른 언니들도 나서주어서 니시다를 당황시킨다.

하지만 이후, 건강검진이랍시고 한명씩 불러내 사과를 주고 면담을 하면서 방에 있던 임산부 수감자에게 감옥에서 아기를 키울 수 있게 해준다는 거래조건으로 관순의 이름을 따내고.. 이에 주동자로 지목된 유관순은 손목으로 허공에 매달아놓고 옷을 풀어헤쳐서 수치심을 주거나 일주일을 서있는 관에 가둬진 채 옴짝달싹 못하는 등 말로 이루 표현하지 못할 모진 고문을 당한다.

고초끝에 감옥으로 돌아온 유관순은 부모님 기일이자 만세운동 1주년이 다가오는데 뭐라도 해야겠다며 원래는 모범수들만 시키는 노역을 자원해서 빨래일을 하던중 양잿물을 만지던 손은 온통 엉망이고 밥도 항상 엉망이 됐다.

날짜라도 알고 싶어서 교도관인 니시다에게 날짜라도 알려달라고 존대하고 고개를 숙이며 부탁을 하기도 한다.

결국 3.1운동이 일어난지 1년 뒤 그날, 빨래노역장에서 쓰러지는 연기를 하고 방으로 돌아온 후, 독립선언문을 외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친다.

이에 방 안에 있던 사람들도 따라 외치고, 그 소리를 들은 다른 방 사람들과 그리고 남성수감자들이 있는 곳에서도 대한독립만세가 울려퍼졌다.

간수들은 이 소리를 어쩔줄 몰라 하고있는 사이 형무소 밖에서도 만세소리를 듣고 사람들이 우루루 거리로 몰려나와 다함께 만세를 외친다.

결국 니시다가 그날 유관순이 노역장에 없었던걸 알아내서 관순이 주동자로 잡혀가서 고문을 받는데 일본 교도과장은 관순의 손톱을 들어내고 자식도 못낳게 해야한다며 배를 발로 차서 방광과 자궁을 파열시켜버린다.

그 사이 특별사면으로 형을 모두 반으로 줄여주어서 관순을 제외한 방사람들이 모두 나가게 됐고 관순도 교도과장 앞에 불려 나와 자신의 형량이 절반으로 줄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지만 자신은 애초에 죄를 짓지 않았으니 형이 반으로 줄든 말든 상관없다고 한다.

영화 후반부 단식을 하는 관순에게 다른 노역자가 "왜 그렇게까지 하는거요?" 라고 묻자 유관순은 "그럼 누가 합니까"라며 자신의 신념을 담담하게 내뱉는다.

그렇게 감방에서 숨을 거두면서 영화는 흑백에서 다시 컬러로 돌아오고 끝이 난다.

"만세 누가 시켰냐"는 교도관의 '우문(愚問)'에 "만세를 부른건 다 너희 일본 때문이다"라는 유관순 열사의 '현답(賢答)'이 아직도 생생하게 모든이들의 귓전에 맴돈다.

김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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