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한 기록

   1598년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병사하자, 그후 일본군의 철수작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9월 명나라 제독 유정(劉綎)이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부대가 주둔한 순천 왜교성을 공격했는데, 9월 20일부터 10월 4일까지 왜교성 전투가 벌어졌다. 왜교성은 노량해전이 벌어지기까지 일본군의 최후 전략기지로서 노량해전 과정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후 11월 유키나가가 유정과 진린(陳璘)의 허가로 귀환을 시도했으나 이순신의 적극적인 공격으로 탈출이 어려워지자, 남해와 사천, 부산에 있던 일본군이 유키나가 구출작전에 나섰다. 이에 이순신은 큰 바다로 진을 옮기고 일본군의 공격을 대비했다. 17일 초저녘 사천의 적장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와 남해의 적장 야나가와 시게노부(柳川調信) 등이 노량(露梁)으로 출동하고, 이튿날 요시히로와 남해의 소 요시토시(宗義智), 부산의 데라자와 마사나리(寺澤正成)와 다카하시 무네마스(高橋統增) 등이 연합한 일본선 500여 척이 노량과 남해일대에 집결하였다. 이때 조명연합군의 전선 3백(4백)여 척이 진영에 도착했다.

  이날 밤 10시경 이순신과 진린이 여수의 묘도(猫島)를 출발하여 좌우협(左右協)이 되어 조선수군은 노량해협 우측인 남해의 관음포(觀音浦)에 주둔하고, 명군은 해협 좌측에 있는 곤양의 죽도(竹島)에 주둔했다. 일본군은 사천 남해 수로[산도(山濤)]에 운집하여 노량을 지나 왜교를 향했다. 19일 자정 이순신이 배 위에서 하늘에 빌기를, “이 원수를 제거한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라고 하자, 홀연히 바다 가운데로 큰 별이 떨어졌다.

  그후 새벽 2시경 조명연합군과 일본군 간의 교전이 시작되었다. 이 전투가 아침까지 이어졌는데, 이때 이순신이 부하들에게 명하기를 “일본군의 머리를 베는 자가 있으면 군령을 내릴 것이다.”라고 하여, 전공보다 전면전에 힘쓰도록 독려했다. 일본선이 연소되고 불리해지자 일본군이 관음포 항구로 후퇴하여 들어가니 퇴로가 없어 마침내 반격하며 조명군과 치열한 육박전을 벌였다.

  이때 이순신은 직접 북채를 잡고 먼저 올라가 일본군을 추격하며 죽였는데 일본군의 포병이 배꼬리에 엎드려 이순신에게 일제히 발사하여 이순신이 탄환을 맞았다. 이순신은 “전쟁이 한창 다급하니 부디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말하고 운명했다. 이는 아군의 사기저하와 일본군의 반격을 염려한 최후의 고언이다. 이때 일본군의 머리 9백급을 베고 일본선 2백 여척을 분멸하는 전공을 세웠다. 이것이 노량해전이다.

  한낮이 되기 전에 요시히로 등은 50척으로 도주했고, 유키나가는 몰래 예교에서 배를 띄워 묘도의 서량(西梁)과 남해의 평산보(平山保), 부산바다를 거쳐 곧장 대마도로 건너갔다. 남해에 남은 일본군들은 섬 가운데의 육로를 거쳐 미조항(彌助項)으로 빠져 나갔고, 유정은 연기와 화염에 쌓인 빈 왜교성으로 늑장 출동했다.

  오는 12월 15일은 음력 11월 19일로 이순신이 전사한 날이다. 비록 문헌해독력이 부족한 비전문가들에 의해 자살설이 나오긴 했지만, 마지막 전사한 날까지의 당시 기록을 보면 자살로 볼만한 내용이 전혀 없다. 공자는 “자주색이 붉은색을 빼앗은 것을 증오한다[惡紫之奪朱也]”고 했다.(《논어》〈양화〉) 문헌을 오독하거나 일본인의 오독을 답습하여 사실을 왜곡하는 등의 간색이 정색을 가리는 일은 지양해야 한다. 또한 이순신이 《난중일기》를 마지막으로 작성한 날짜를 무술년 10월 7일로 잘못 말하는 경우도 있는데, 일기를 절필한 날은 무술년 11월 17일이 분명하다.

 

  글 : 노승석 여해(汝諧)고전연구소 대표 (고전 및 초서전문가, 이순신연구가)

  역서 : 《난중일기유적편》(여해, 2019)

          《교감완역 난중일기》(여해, 2019)

노승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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