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수원, 화성의 옛 발자취를 따라서

사진= 창덕궁 전경

[데일리그리드=정정환 기자]  

현재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서 경기도의 중심 수원을 거쳐 경기도 서남해안을 끼고 있는 화성으로 이어지는 길은 옛 조선의 흔적으로 가득한 길이다.

왕이 거쳐하던 궁궐을 비롯하여 왕들의 영혼을 모신 사당, 수도을 방어하던 산성, 치밀하게 설계된 옛 신도시, 왕의 육신이 잠들어있는 왕릉에는 조선의 기술, 에술,의례, 생활문화, 정신세계 등이 총망라되어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진= 창덕궁 부용정

* 자연과 조화를 이룬 '창덕궁'
1405년에 건립된 조선의 별궁이며 임진왜란때 경복궁,창경궁과 함게 불에 타 버렸으나, 제일먼저 다시 중건 되었다. 그런 이유로 경복궁이 지어지기 전까지 조선의 중심지 역확을 했다. 창덕궁은 자연지형에 맟줘 제각기 다른 형태로 자유롭게 지어진게 특지이다.

특히, 왕실의 정원인 후원은인공적인 건축물 마저 숲의 일부로 보일만큼 자연경관을 그대로 살리고 있는데 이는 자연의 조화를 추구한 우리나라 특유의 정서와 문화가 반영된 것이라 하겠다.

창덕궁에 있는 연못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이곳엔 바로 '부용정(보물제1763호)'이 자리하고 있다.

사진= 종묘 전경
사진= 종묘 전경

* 조선의 역대 선왕들을 모시는 사당 '종묘'
조선의 왕과 왕비가 붕어한후 왕으로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는 사당이다. 1394년(태조3년)에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에 완성되었다. 유교와 성리학에 뿌리를 둔 조선왕조는 제사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유교의 예법을 충실히 따르는 것은 왕실의 권위와 직결되는 일이었기에 태조 이성계는 종묘를 가장 먼저 지은것이다. 이는 당시 종묘가 국가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왕실의 정통성을 보여주는 신성한 곳이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특히, 별도의 사당인 종묘 영년전(보물제821호)은 태조의 선대 4조와 정전에 봉안되지 않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고 있고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간결하고 담백한 건물에서는 절제된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사진= 남한산성 전경
사진= 남한산성 전경

* 한양 방어를 위한 조선의 성곽 '남한산성'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조선 제16대 인조는 명과 가깝게 지내는 정책을 펼쳤었다. 당시 명과 대치하고 있던 여진족의 나라 후금은 조선을 침략하였는데 이를 '정묘호란'이라고 한다. 이를 계기고 두나라는 형제의  관계를 맺었으나 다시 정국이 악화되어 이후 국호를 '청'으로 고친 후금은 다시 대군을 이끌고 침략하였는데 바로 '병자호란'이다. 이때 인조가 피신한 곳이 '남한산성'이었다. 패배의 역사가 남아있긴 하지만 남한산성 자체는 사실 한번도 함락된적이 없는 천혜의 요새이다. 북한산성과 함께 수도 한양을 지키던 이곳은 옛 신라 문무왕때 쌓은 주장성의 옛터를 활용하여 인조때 다시 고쳐 쌓은 곳이다.

국가의 정무시설 뿐만 아니라 종묘사직의 위패를 봉안한 이곳은 남한산성이 유사시에 임시수도 역활을 할 수 있었음을 보여주는 유적이다.

사진= 수원 화성 전경
사진= 수원 화성 전경

* 독창적인 계획도시 '수원화성'
조선 제22대왕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최고의 명당이었던 수원 화산(현재 화성)으로 옮겼다. 화산 주변에 살고 있던 백성들에게 새로운 터전을 제공하고 당쟁 근절 및 왕도정치 실현을 위해 1796년 팔달산아래 신도시를 건설했는데 그곳이 바로 수원 화성이다. 정조의 개혁정신을 바탕으로 실학자 정약용의 설계로 문신 체제공의 감독으로 축성된 수원 화성은 거주지 기능과 방어기능, 상업기능이 합쳐진 성곽도시 였다.

동.서양의 과확기술과 건축술이 총 동원된 이 계획도시는 유례를 찾기 힘들 만큼 독창적이고 독보적이다. 주변 지형을 따라 자연스럽게 지어진 성곽에는 공심돈,포루, 노대, 봉돈,암문등의 시설이 방어와 공격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도록 설치되어 있다.

또한, 화성행궁의 정전인 봉수당에는 1795년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이 거행되기도 했다.

사진= 화성 융릉과 건릉 MAP
사진= 화성 융릉과 건릉 MAP

* 사도세자와 정조의 능 '화성 융릉과 건릉'
조선 21대 영조의 둘째아들인 사도세자는 당쟁에 휘말려 27세 나이에 뒤주에서 생을 마감한 비운의 왕세자이다. 영조에 이어 왕위에 오른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정헌세자로 개칭한뒤 배봉산 기숡에 있던 무덤을 지금의 경기 화성으로 이장했다. 당시에는 현릉원으로 불리웠지만 1899년(고종36년)에 '장조의황제'로 추촌되어 융릉으로 승격되었다. 

남편과 함께 합장되었던 혜경궁 홍씨도 '헌경의황후'로 추촌되었다. 추촌은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사람에게 임금의 칭호를 주는 것을 말한다.

조선 최고의 명당에 조성된 융릉은 추존왕이라는 사실에 무색할 정도로 장중하고 화려하다. 융릉 서쪽 울창한 숲길 너머에는 정조와 효의왕후 김씨의 합장릉인 건릉이 자리하고 있다. 원래는 융릉 동쪽에 있었으나 풍수지리상 그 자리가 좋지 않다고 하여 1821년(순조21년)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능 입구로 들어가서 걷다보면 두개이 갈림길이 나타나는데 오른쪽이 융릉으로 이어지고 왼쪽은 건을으로 이어진다.

정정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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