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의 정수(精髓)

 이순신의 문집인 《이충무공전서》가 1795년 처음 간행된 이후 6간 되기까지 선인들의  끊임없는 노력이 있었다. 여기서 특히 주목할 점은 이에 앞서 1707년(숙종 33년)에 이순신의 현손인 이홍의(李弘毅)가 이순신의 유고와 관련 기록들을 모아 《충무공가승(忠武公家乘)》을 간행한 것과 이것이《이충무공전서》의 저본(底本)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해서는 10여 년 필자가 밝히기 전만해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이 두 책의 목차를 서로 비교해 보면, 전서의 윤음(綸音)․비명(碑銘), 권수(卷首) 교유(敎諭)․사제문(賜祭文)․도설(圖說)․세보(世譜), 시(詩)․잡저(襍著) 및 기실(紀實) 등의 내용이 서로 일치한다. 다만, 가승에 없는 장계와 《난중일기》는 전서를 편집할 때 별도로 추가한 것이다. 특히 최후에 간행된 전서에서 추가된 내용에 대해서는 별도의 고증이 필요하다.

 본래 이순신에 대한 기록은 조카 이분(李芬)이 지은 《행록》에서 시작되어 그후 《충무록》이 간행되었지만 내용이 너무 적다. 인조(仁祖) 때 한문 4대가(漢文四大家)의 한 사람인 택당 이식(李植)이 행장을 쓰고 그의 아들 외재(畏齋) 이단하(李端夏)도 이순신의 시에 발문을 쓰기도 했다. 초기에 전서의 저본이 되었던 이순신의 문집형태의 기록이 만들어지기까지 무엇보다 이순신의 후손들의 노력이 지대했다.

당초 후손들에 의해 민간에서 간행된 이순신의 유록이 드디어 국가차원에서 간행된 것은 정조(正祖)의 이순신에 대한 남다른 평가가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정조실록》을 보면, 정조가 하교하기를 “이번 일은 충의를 드높이고 공로에 보답하며 무용을 드러내고 공적을 표창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라고 간행의 의의를 표명했다. 또한《홍재전서(弘齋全書)》의 〈군서표기(羣書標記)〉에서도 정조는 “충무(忠武)와 같은 공과 명성이 있는데도 그의 평소 저술과 제가들이 그에 대해 기록한 글들을 모은 책이 아직도 없으니 어찌 아쉬운 일이 아니겠는가.”라고 하고 간행된 전서를 이순신의 혼령을 모신 각 사당에 비치하도록 명했다.

이러한 정조의 특별한 관심으로 간행된 《이충무공전서》가 오늘날에 전해 내려오기 까지 220여년 동안 이순신의 후손과 학자들이 노력한 공로는 매우 값진 것이다. 비록 이 안에 들어 있는 전서본 《난중일기》가 친필 초고본과 다소 차이가 있지만, 이는 이미 필자가 교감본을 통해 규명하여 고증하였고, 그 외 장계와 별록 등에 대해서는 앞으로 철저한 고증과 교감작업이 필요한 상황이다.

돌아보면 지금까지 세인의 이순신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남다르다고 하겠지만, 그에 비해 그의 문집인 《이충무공전서》에 대한 연구는 매우 저조한 편이다. 이 내용이 방대하고 원전을 연구하기 어려운 점이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연구보다는 남이 해놓은 연구를 이용만 하려는 태도는 지양해야 한다. 요컨대 이순신이 남긴 《난중일기》와 한시 등에 나타난 그의 뛰어난 문장력을 보면 그를 결코 평범한 한 장수로만 볼 수가 없다. 이순신 연구에 있어 정수(精髓)라 할 수 있는 그의 정신세계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이순신의 생애가 고스란히 담긴 《이충무공전서》에 대한 철저한 고증과 연구는 앞으로 우리가 해야할 과제이다.

         글 : 노승석 이순신 연구가(교감완역 난중일기 저자)

노승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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