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정심이 仁의 시작이다

  노승석 이순신 전문연구가(증보 교감완역 난중일기 저자)

  인격수양자가 중요시 하는 것은 인(仁)의 정신이다. 인간사에서 항상 참된 도덕의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공자(孔子)는 “인(仁)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愛人]”라고 하였다.(『논어』「안연」) 인간 사랑이 곧 도덕 실천의 근본인 것이다. 인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가족사랑을 시작으로 남들에게도 널리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

  중국 진(秦)나라 말기의 병법가 황석공(黃石公)은 “측은히 여기는 마음은 인(仁)의 나타남이다[惻隱之心, 仁之發也].”라고 하였다(「하략」). 성선설을 주장한 맹자(孟子)의 사단(四端) 이론과 같은 말을 한 것이다. 남에게 동정심을 베푸는 것이 인의 시작이자, 인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이순신은 무과출신의 장수로서 평소의 모습이 매우 엄정해 보였지만, 내면은 문인적이고 감성적이면서 인정이 매우 많았다.

  이순신이 1583년 함경도 건원보(乾原堡) 권관(權管, 종9품)으로 재직할 때(39세) 변방을 수비하는 한 병사가 부모의 사망소식을 듣고도 형편이 어려워 타고갈 말이 없었다. 이 사정을 들은 이순신은 그를 동정하여 그 자리에서 자신이 타고 있던 말을 내주었다고 한다. 상관으로서 부하의 딱한 사정을 보고 측은히 여겨 도와 준 것이다. 여기서 그의 남다른 배려심을 알 수 있다. 손무(孫武)는 “병사들을 자식처럼 사랑해야 죽음을 함께 할 수 있다.”고 하였다(『손자』「지형」).

  이순신은 부친 이정(李貞)이 사망한 후, 두 형을 먼저 잃고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대가족을 거느렸다. 가족들의 수가 어머니와 부인, 자식을 합하여 11명이었고, 형수와 동생 우신(禹臣), 제수, 조카들까지 포함하여 20여 명이나 되었다. 1589년 12월 정읍 현감에 임명되어 부임지로 가는데 조카들이 어머니를 따라 함께 가게 되었다. 이를 본 어떤 이가 남솔(濫率, 관리가 제한 수 이상의 가족을 데리고 가는 것)이라고 비난하자, 이순신은 눈물을 흘리며, “차라리 남솔의 죄를 지을지언정 의지할 데 없는 어린 조카들을 차마 버리지 못하겠다.”고 말하였다. 관리로서 복무규정을 준수해야 하나 이순신은 규정보다 가족 사랑이 더 소중했다.

  이순신은 전쟁 중에 많은 피난민들을 보살피려 했지만, 일일이 도와줄 수 없는 안타까움을 토로하였다. 1592년 5월 10일 이순신이 작성한 <옥포에서 왜병격파를 고한 장계(玉浦破倭兵狀)>를 보면, 적진포(赤珍浦, 경남 통영소재) 근처에 사는 귀화인 이신동(李信同)이 노모와 처자를 잃고 애원하며 호소하는데, 이순신이 그 실정을 가련히 여기고 포로가 될 것을 염려하여 곧 데려간다며 달래주었다. 또한 적의 종적을 알려주는 자가 보기에도 불쌍하여 바로 태우고 싶었으나 전선에 사람을 가득 실으면 배 운전이 어려워지므로, “돌아갈 때 데려 갈 테니 각자 깊이 숨어 발각되지 말라.”고 당부했다. 적을 쫓아 멀리 갔다가 서쪽 피난 기별을 듣고 어찌할 바를 모르며 노를 재촉하여 바로 돌아왔는데 가엾은 심정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고 했다.

  임진왜란 중에 상당수의 피난민들은 전쟁으로 인해 부모와 처자식을 잃고 자신의 목숨마저 보전하기 어려운 참담한 생활을 하였다. 이순신은 전쟁하는 와중에도 무고한 민초들에 대한 연민과 동정심이 지대했다. 인간으로서의 양심을 저버리지 않고 인륜적인 책임을 다하려는 자세에서 진정한 인간 사랑의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이순신의 리더십(노승석 저, 여해 2014 간) 참고인용

노승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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