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이 편해야 나라가 안정된다

  노승석 이순신 전문연구가(증보교감완역 난중일기 저자)

  임진왜란 중에는 각 진영마다 병력의 부족으로 병사를 징용하는 문제가 중요했다. 이때 특히 정규군은 아니지만, 사색 제방군(四色除防軍, 보충군인)의 역할이 매우 컸다. 이들은 유사시 겨울에 동원되어 해상과 육상에 배치되고 각 지역의 방위를 맡았다. 그러나 이 인원 역시 부족하게 되자, 제방군의 친척이나 이웃에게도 병역을 부과하다가 제도가 비합리적이라는 이유로 모두 폐지되었다.

  그 결과 각 지방 단위의 진영은 더욱 병력이 고갈되어 전쟁을 원만히 수행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해상 방위병은 북쪽 내륙으로 멀리 파견가게 되어 각 고을마다 소동이 일어나고, 군대에 노약자들이 동원되는 등 폐단이 적지 않았다. 이에 이순신은 임진년 12월 10일 <일족에게 징용하지 말라는 명령을 취소하기 청하는 장계>를 조정에 올려 그 문제점을 보고하였다.

  모병관이 내려와 내륙과 연안을 구분하지 않은 채 군사의 수만을 결정하여 심하게 독촉하고 각 고을에서는 변방군사를 빼다가 충원하고, 각 고을에 남은 장정을 징용하여 복수의장(復讎義將) 고종후(高從厚)가 내노비와 사노비를 남김없이 빼갔습니다. 모병관이 번갈아 수색하여 쉬는 날이 없으므로 백성들의 근심과 원망의 소리가 귀에서 떠나지 않으니, 국가가 회복되야 할 시기에 크게 실망하여 한 모퉁이의 외로운 신하는 북쪽을 바라보고 통탄하며 마음은 죽고 형체만 남아있습니다. (…) 전선은 비변사의 공문이 도착하기 전에 신(臣)이 이미 본영과 여러 진포(鎭浦, 진영과 포구)에 명령하여 많은 수를 더 만들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한척의 전선에 사부(射夫)와 격군을 포함하여 130여명의 군사를 충당해야 하는데, 그 방법이 없어서 더욱 걱정되니, 위의 ‘병사의 친족에게만 징용하는 일’을 전과 같이 시행하되 차츰 가려내어 백성의 원망을 풀어주는 것이 지금의 급선무입니다.

                                   -『임진장초』, <청반한일족물침지명장(請反汗一族勿侵之命狀)>-

모병관이 군대에 부족한 병력을 충원하기 위해 무작위로 민가의 장정과 노비 등을 차출해 갔다. 이전에 사색 제방군에 대한 모병제도가 존재했을 때는 이들이 비정규군으로 충원되더라도 일정한 모집규정이 있어서 큰 혼란은 없었다. 그러나 그 제도를 폐지하고 나니 징용대상자가 대부분 흩어지거나 도주하게 되었고, 이에 모병관은 수시로 수색하여 징용하는 등의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결국 이로 인한 모든 피해는 백성에게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래서 이순신은 이러한 사항을 보고하고 조속히 원래대로 모집규정을 마련해 주기를 조정에 요청하였다. 제갈량은 “원성을 듣지 못하면 잘못된 것을 바로잡지 못한다[怨聲不聞, 則枉者不得伸].”고 하였다(『편의십육책』「시청(視聽)」). 민생안정을 위해서는 먼저 그들의 불만사항이 무엇인지 부터 신속히 파악하여 조치해야 한다.

  전쟁 중에 지방관리는 지방행정을 보면서 군대의 지원업무도 겸하였다. 그러나 전쟁 중이라 상급기관이 일일이 감독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지방 관리의 행정에 문제가 많았다. 이에 이순신은 갑오년(1594) 1월 10일 백성을 학대하는 관리를 적발하여 <흥양목관 교체를 청하는 장계>를 조정에 올렸다.

  호조의 공문에 의하면 순찰사 이정암(李廷馣)의 공문에, ‘위의 돌산도 등 의 감목관에게 이미 둔전관(屯田官)을 겸임시켰다’하고, 순천 감목관 조정(趙玎)은 이미 전출하고 정식 후임이 아직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흥양(興陽, 전남 고흥) 감목관 차덕령(車德齡)은 부임한지 이미 오래인데, 멋대로 처리하여 ‘말 사육자들을 몹시 학대하며 안정되게 살 수 없게 하므로 온 경내의 백성들이 원망하며 걱정했다.’고 합니다. 신(臣)은 가까운 곳에 있어서 그 소문을 들었는데, 농사에 관한 모든 일을 이 사람에게 맡긴다면 망칠 것이고 백성들의 원성은 더욱더 심해질 것이니, 차덕령을 빨리 교체시키고 다른 담당자를 임명하여 빠른 시일 내에 내려 보내어 농사감독에 힘써서 시기를 놓치지 않게 해주십시오.

                                                -『임진장초』, <청개차흥양목관장(請改差興陽牧官狀)>-

이순신은 전남 고흥군 도양장(道陽場, 말 기르는 곳)에서 목축을 관리하는 차덕령의 학정(虐政)을 조정에 보고하였다. 백성을 제대로 돌보지 않는 관리가 농사일을 망칠 것이 뻔하였고, 백성들의 원성만이 높아질까 매우 걱정이 되었다. 그 당시 각 지방의 곡물생산은 민생과 군량보급의 자원이 되었기 때문에 전쟁 중 농사를 감독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였다. 그러므로 농사준비에 착오가 없게 해주기를 요청한 것이다. 오기(吳起)는 “백성이 주거를 편히 여기고 관리자와 친해지면 수비가 견고해진다[民安其田宅, 親其有司, 則守已固矣.].”하였다(『오자』「도국」). 백성의 원성이 없고 행정이 바르게 되면 민생안정과 함께 국가의 기강도 바로잡히는 것이다. 『서경』에 “하늘이 보는 것은 우리 백성을 통해서 본다[天視自我民視].”고 하였다(「태서중」). 백성의 바른 시각은 항상 하늘을 대변해 준다. 이순신은 전쟁 중에 민생을 중시하여 목민관으로서의 역할도 다할 줄 알았던 것이다.

노승석의 대표저서

증보교감완역 난중일기(여해), 이순신의 리더십(여해)

노승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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