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엔 ‘못해’ 안달, 지금은 ‘안 해’ 발뺌

 
허창수 전국경제인연합회(이하 ‘전경련’) 회장의 3연임을 두고 전경련의 의미가 재계에서 표류되는 듯하다.
과거 고(姑)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와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 등 창업세대 기업인들이 주축을 이루며 전경련의 부흥기를 가져왔지만 최근 국가 경제정책에 배제되는 등 기업을 대변하는 역할조차 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주를 이루고 있다.
한때는 ‘재계 본산’이었던 전경련이 언제부터 이렇게 추락한 것일까.

허창수 전경련 회장의 세 번째 연임을 두고 재계는 대안이 없었다는 자체 평가를 내렸다. 전경련은 얼마 전 서울 여의도 전경련 회관 컨퍼런스센터에서 정기총회를 열고 현 회장인 허 회장을 제35대 전경련 회장으로 선임했다.
허 회장은 “새롭게 시작되는 2년의 임기 동안 미래 성장 동력을 발굴하고 육성하는 데 역점을 두고 사업을 추진하겠다”라고 취임사의 운을 뗐다. 이어 “구조적 장기불황의 우려를 털어내고 힘차게 전진하자”고 말했다.
하지만 업계는 반갑지만은 않은 눈치다. 안팎으로 허 회장이 어쩔 수 없이 회장직을 이어가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허 회장은 처음 전경련 회장으로 추대된 2011년과 연임 때인 2013년 모두 회장직을 고사했다.

이건희 놓치고 부랴부랴
지난 2011년 제32대 회장을 맡고 있던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이 7월 건강상의 이유로 사퇴를 선언하자 전경련은 즉시 후임 인선 작업에 돌입했다. 당시 전경련 회장단은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을 추대하려 했다. 이건희 회장의 초청으로 만찬에 참석한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등 재계 주요 총수들은 만장일치로 이 회장에게 차기 회장직을 맡아달라고 요청했으나 이 회장은 이를 고사했다.
전경련이 ‘이건희 바라기’에 빠져 있는 7개월 동안 회장직은 내내 공석이었다. 물망에 올랐던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과 박용현 두산연강재단 이사장도 회장직 제의에 손사래를 쳤다. 결국 전경련의 선택은 허창수 회장이었다.

이후 2013년 허 회장의 첫 연임은 진통의 시작이었다. 당시 허 회장은 정기총회를 앞두고 회장직을 물러나겠다는 뜻을 밝혔다. 하지만 허 회장의 사임은 이뤄지지 않았다.
당시 이건희 회장과 정몽구 회장은 건강 등의 이유로 회장직을 고사했고 구본무 회장은 1998년 이른바 ‘빅딜’ 사건 이후 전경련 행사에 발길을 끊은 지 오래였다. 이준용 대림산업 회장과 박영주 이건산업 회장이 물망에 오르기도 했으나 ‘굵직한 인물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반대가 심했다.
올해 역시 허 회장은 3연임을 하지 않겠다는 뜻을 애당초 밝혔다. 허 회장은 지난달 초 연임 여부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에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답했다. 하지만 결국 하기 싫다고 해서 안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결국 허 회장은 3연임됐다. 이날 전경련의 ‘정기 총회’는 회장의 연임을 발표하는 자리인 것이 무색할 만큼 썰렁했다.
4개로 구성된 중앙 테이블에 재계 30대 그룹의 오너 회장은 찾아볼 수 없었다. 회장단 중 참석자는 허창수 전경련 회장과 김윤 삼양사 회장, 강신호 전 전경련 회장(동아쏘시오 회장) 등 3명뿐이었다. 허 회장의 GS그룹 계열사인 GS파워 손영기 사장만이 허 회장 바로 옆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이 날 전경련은 “회장단은 굳이 참석하지 않아도 되는 행사”라고 해명했지만, 허 회장을 연임을 발표하는 ‘정기총회’라는 이름에 걸맞은 행사라고는 보긴 어려웠다. 전경련의 진성회원인 오너 회장 대신 기업의 대외업무 담당 직원들이 나와 자리 일부를 채웠다. 이 날 새로 회장단에 선임된 이장한 종근당 회장과 이승철 상근부회장을 포함한 회장단은 총 20명이었다.
박용만 두산 회장을 비롯해 구본무 LG회장, 김준기 동부 회장 등은 이미 전경련에 발길을 끊었다. 최태원 SK 회장, 김승연 한화 회장, 조양호 한진 회장 등도 최근 대외 활동이 여의치 않다. 결국 허창수 회장과 이승철 부회장을 제외하면 회장단 회의에 참석하는 사람의 숫자는 4~5명에 불과한 실정이다.
전경련은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새 회원을 회장단에 가입시키려 노력해왔다.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 신창재 교보생명 회장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모두 고사하면서 무위로 돌아갔다. 네이버, 다음 등 2000년대 급성장한 IT업체들은 아예 전경련 가입을 피하고 있다.

 

회장직 ‘구인난’ 수모
이처럼 재계 목소리를 대변한다는 달콤한 권력의 상징인 전경련 회장직이 구인난에 허덕이고 사장단 가입조차도 하나같이 기피하고 있는 이유는 뭘까.
전경련 정기총회는 불과 5년 전까지만 해도 최소 5~6명의 회장단을 포함, 주요 그룹 오너와 임원들이 얼굴을 비쳤던 행사였다. 사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전경련의 위상은 하늘 높은 줄 몰랐다.
전경련은 1961년 7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로 일본의 경제단체연합회(경단련)를 모방해 조직한 한국경제인협의회로 시작됐다. 회장은 고(故) 김연수 삼양그룹 창업자가, 부회장은 고(故) 전택보 천우사 창업자와 고(故) 이한원 대한제분 창립자가 맡아 이끌다가 같은 해 7월 재계 유지 13명이 모여 경제재건촉진회 창립총회를 열고 우리나라 최초의 시멘트공장인 대한양회의 설립자 고(故) 이정림 회장이 회장으로 선출됐다.
같은 해 8월 한국경제인연합의회는 이름을 한국경제인협회로 바꾸고 본격 활동에 들어갔다. 정부의 대형 국책공사 물량이 나오면 전경련이 분배를 담당했고 업체 간 과다경쟁을 방지하는 역할을 맡았다. 전경련 회장직은 기업 오너라면 누구나 탐내는 자리였다.
 
회장직을 보낸 역대 기업 오너도 화려하다. 초대회장 고(故)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재임기간 1961년 8월∼1962년 9월)를 시작으로 고(故) 이정림 대한양회 설립자가 2, 3대 회장(1962년 9월∼1964년 4월), 고(故) 김용완 경방 창업주가 4, 5, 9, 10, 11, 12대 회장(1964년 4월∼1966년 4월, 1969년 4월∼1977년 4월), 고(故) 홍재선 쌍용양회 회장이 6, 7, 8대 회장(1966년 4월∼1969년 4월)을 맡았다.
이후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가 13, 14, 15, 16, 17대 회장(1977년 4월∼1987년 2월),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이 18대 회장(1987년 2월∼1989년 2월), 고(故) 유창순 호남석유화학 회장(전 국무총리)이 19, 20대 회장(1989년 2월∼1993년 2월), 고(故) 최종현 SK그룹 회장이 21, 23대 회장(1993년 2월∼1998년 8월),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이 24, 25대 회장(1998년 9월∼1999년 10월) 등 당대 재계를 대표하는 그룹 총수들이 이끌어 왔다.
정주영 창업주가 회장으로 재임하던 1977년부터 10년이 전경련의 최전성기라 할 수 있었다. 여의도 전경련 회관이 지어졌고, 서울 올림픽이 유치됐다. 전경련 앞에 ‘재계의 본산’이라는 말이 붙고, 전경련 회장이 ‘재계의 총리’라고 불리기 시작한 것도 이때였다.

그러나 1993년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 전경련은 하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정부가 대기업에 대한 규제를 강화했고 당시 회장이던 최종현 회장은 이를 강하게 반발했다. 덕택에 SK는 한동안 국세청과 공정거래위원회의 조사 대상이 되어야 했다. 여기에 1997년 외환위기가 터졌고 1998년 전경련이 ‘빅딜’을 추진하면서 내분까지 생겼다.
2000년대 들어서자 재계와 노동계 간의 갈등,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갈등이 심화됐고 통상임금이나 비정규직 문제, 동반성장, 갑질 논란까지 더해지면서 총수들은 전경련을 기피하기 시작했다.
26, 27대는 고 김각중 전 경방 명예회장, 29, 30대는 강신호 동아제약 회장, 31, 32대는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이 회장직을 맡았다. 총수보다는 전문경영인이 전경련 회장으로 오르거나 이건희 회장 등 일부 총수들은 회장직 수락 여부보다 회장단회의 참석 여부가 더 관심을 끌기도 했다.

회장단 자격 대폭 낮추며 ‘수혈’
전경련 회장 기피 현상은 회장단 구성에도 영향을 미쳤다. 현재 전경련 회장단은 회장 1명, 상근부회장 1명, 부회장 18명 등 20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경련은 지속적으로 회장단 확대를 추진하고 있지만 여의치 않다.
전경련은 올해 정기총회에 앞서 2013년부터 30대 그룹 총수에 한정됐던 회장단 자격을 50대 그룹으로 확대했다. 그룹 부도로 강덕수 전 STX그룹 회장과 현재현 동양그룹 회장이 사퇴하면서 생긴 빈자리를 채워야 했을 뿐만 아니라 재계 곳곳에서 전경련의 역할을 확대해야 한다는 지적이 일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회장단 자격 확대에 따라 이중근 부영그룹 회장, 이수영 OCI그룹 회장, 장형진 영풍그룹 회장,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 신창재 교보생명 회장 등이 부회장 후보로 거론됐다. 허 회장과 이승철 전경련 상근부회장이 직접 영입에 나서기도 했다. 2~3명 정도는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 예상됐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현재까지 전경련에 신규 영업된 부회장은 이장한 종근당 회장이 유일하다. 50대 그룹 수장으로 가입이 한정된 전경련 회장단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인사일 수밖에 없는 것이, 종근당의 재계순위는 716위(2013년 자산 기준)이다.
전경련 측은 이 회장 선임에 대해 “2003년경 업종별로 다양한 목소리를 전경련에 담아내자는 취지에서 각 업종 대표들이 부회장으로 선임됐는데 고 허영섭 녹십자 회장이 그 역할을 맡았던 적이 있다”며 “허 회장의 타계 이후 제약업계 목소리를 전해 줄 부회장이 없었는데 이번에 이 회장을 영입했고 그 역할이 주어진 것으로 안다”고 밝혔지만 쉽게 수긍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다.
이정치 일동제약 회장과 강정석 동아쏘시오홀딩스 사장이 전경련 이사로 신규 선임된 이유도 이와 궤를 같이 한다.
현재 전경련 부회장은 이승철 상근부회장을 비롯해 이건희 회장, 구본무 회장, 김승연 회장, 조양호 회장, 정몽구 회장, 이준용 회장, 신동빈 회장, 최태원 회장, 이장한 회장, 박영주 회장, 이웅열 코오롱그룹 회장, 김윤 삼양사 회장, 류진 풍산그룹 회장,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 김준기 동부그룹 회장,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 장세주 동국제강 회장, 권오준 포스코 회장 등이 맡고 있다.
하지만 이들 중 제대로 전경련 활동을 하는 인사는 거의 없다. 와병 중인 이건희 회장, 수감 중인 최태원 회장, 전경련과 거리를 둔 지 오래인 정몽구 회장, 집행유예 상태인 김승연 회장,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직으로 사퇴 의사를 전달한 박용만 회장, ‘땅콩 회황’사건으로 외부 활동을 자제하고 있는 조양회 회장 등 거의 모든 거물급 오너들은 전경련과 등을 돌렸다.

전경련 관계자에 따르면 격월로 열리는 회장단 회의에 참석이 가능한 회장단은 10명 정도다. 하지만 실제 참석은 6~7명 정도만 이뤄지고 있다. 최근 수년간 전경련 회장단 회의에서 참석률이 절반을 넘긴 경우는 손에 꼽는다. 지난해 1월 9일 새해 첫 전경련 정기 회장단 회의에 국내 5대 그룹 총수 가운데 참석한 사람은 신동빈 회장 단 한 명이었다.
두 달 뒤 신축회관 첫 회장단 회의 때는 회장단 21명 가운데 7명만 참여했다. 국가경제 현안에 대한 재계의 입장을 밝히는 자리가 아니라 소규모 친목 모임으로 전락한 것이다. 참석률이 극히 저조하자 회장단 회의를 비공개로 변경하기도 했다.
한때 ‘재계의 성지’였던 전경련으로서는 치욕적인 선택이었지만 바깥으로 망신을 당하는 실정에선 어쩔 수 없었다.

정치권 눈치 보기 급급
허 회장이 전경련 회장으로 첫 취임하던 2011년, 업계의 기대는 허 회장을 향했다. 10대 그룹 내 회장이 전경련 회장이 된 것이 무려 11년 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허 회장은 한동안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러는 동안 ▲초과이익공유제 추진 ▲기업별 동반 성장지수 발표 ▲중소기업 적합업종 지정 ▲연기금 주주권 행사 강화 ▲법인세 감세 철회 움직임 ▲공정거래법 개정안 처리 등 재계에 대한 정치권 압박이 거세졌지만 전경련의 대응은 없었다.
허 회장이 침묵을 깬 것은 취임 4개월 만인 2011년 6월 기자간담회에서이다. 이날 허 회장은 정치권의 포퓰리즘 정책을 비난하고 감세 철회 논의에 대해 반대 입장을 분명이 했다. 또 휘발유 가격과 동반성장 등 정부의 정책에 대해서도 비판적 태도를 취했다. 당시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과 가진 간담회에서는 “오늘날 중요한 정책결정에서 국가의 장래를 걱정하는 순수하고 분명한 원칙을 제대로 지키고 있는지 의문”이라는 강한 정부 압박 발언까지 했다.
허 회장의 행보에 재계는 환영했다. 이제야 전경련이 제대로 된 역할을 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오래가지 못했다. 허 회장이 몇 차례 여의도로 호출된 후 전경련의 독설은 자취를 감췄고 중립 노선을 타기 시작했다. 허 회장의 두 번째 임기가 시작된 2013년 이후에도 전경련은 특별한 발전이 없었다.
재계 일각에서는 ‘사고만 안치면 다행’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전경련은 지난 2011년 주요 회원 기업에 담당할 정치인 명단을 통보하며 로비를 기획했다가 공개돼 파문을 일으켰다. 2012년에는 국회의원 자녀를 대상으로 리더십 캠프를 추진하다 망신을 당했다. 그리고 2011년에는 재계의 충분한 의견 수렴 없이 1조원 규모의 사회공헌재단을 수립하겠다고 발표했다가 중간에 취소하기도 했다.
전경련도 이러한 비판을 의식해 지난 2013년, “국가경제 발전과 함께 국민 삶의 질 향상을 위해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것을 경영의 최우선 가치로 삼는다”는 내용의 ‘기업 경영 헌장’을 발표했다. 이는 당시 정치권 이슈였던 ‘경제민주화’ 등에 대응하면서, 전경련의 사회적 입지를 다시 구축하기 위한 시도였다. 하지만 2년이 지난 현재 당시 발표는 전경련 내에서 거의 거론되지 않고 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다보스포럼의 주요 의제로 올랐을 정도로 글로벌 이슈가 됐지만, 전경련은 이렇다 할 후속행동이 없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재계 바깥의 시선마저 곱지 않다. 동아시아연구원(EAI)이 2년에 한 번씩 조사해 발표하는 ‘파워조직 영향력, 신뢰도’는 이를 잘 보여준다. 한국의 25개 안팎의 주요 정치, 경제, 사회 조직을 대상으로 실시한 영향력 조사에서 전경련의 순위는 2013년 15위로, 2005년 9위, 2009년 12위에서 해가 갈수록 영향력이 떨어졌다.
2013년의 경우, 영향력(5.43점)은 16위로 전국교직원노동조합(4.80점)을 약간 앞서는 수준에 불과했다. 신뢰도(4.49점)는 13위로, 새누리당(4.49점), 검찰(4.49점)과 같았고 전교조(4.30점)와는 큰 차이가 없었다. 국민들은 전경련이 전교조 수준의 영향력과 신뢰도를 갖고 있다고 평가를 했다는 것이다.
결국 허 회장은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 채 3기 임기를 시작했다. 허 회장은 일단 법인세를 낮춰야 한다며 나름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하지만 재계는 허 회장의 재임 초반 행보가 과거처럼 보여주기 식으로 그치지는 않을지 우려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이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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