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중에 이순신이 세운 전공에 대한 평가는 후대에 올수록 끊이지 않았다. 물론 그 당시에 명나라 장수 진린(陳璘)이 선조(宣祖)에게 “통제사는 천하를 경영할 재주와 세운을 만회한 공로가 있다[經天緯地之才, 補天浴日之功]”고 말한 것만 봐도 그의 위대성은 당시에 이미 인정받고 있었다. 인조(仁祖) 때 한문 4대가(漢文四大家)의 한 사람인 택당(澤堂) 이식(李植)은 이순신의 절개와 충성심, 용병술과 해결능력은 옛 명장들도 앞서지 못할 정도라고 말했다.「시장(諡狀)」

특히 우암 송시열(宋時烈)은 “수십 차례의 크고 작은 싸움에서 온전히 승리하여 동남방을 막은 것은 중흥에 기초가 된 위업이었다.”고 하였다.「노량묘비(露梁廟碑)」 당대 학자들의 이순신에 대한 평가는 이순신에 관계된 문헌정리사업에 큰 영양을 주었다. 이에 1716년 이순신의 현손인 이홍익(李弘毅)가 이순신의 시문과 관련 기록을 모아 『충무공가승』을 편집하였고, 이것이 『충무공전서』의 전범이 되었다.

그후 정조(正祖)는 “충무공은 공로와 명성이 있는데도 그의 저술과 그에 관한 모음집이 없는 것이 아쉬운 일이다.”라고 하고는, 각신(閣臣) 윤행임에게 『충무공전서』를 만들도록 명하였다. 이 일은 정조가 이순신의 충의를 드높이고 공로에 보답하여 표창하려는 의미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여기에 포함된 난중일기가 첨삭이 더해진 형태로 간행되었는데, 이순신이 전란 중에 『난중일기』를 초서로 기록한 것만큼이나 난중일기에 대한 해독작업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러나 이 전서본의 난중일기는 최초 판독본으로서 날짜수가 친필본보다 많은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조선후기 실학자 정약용(丁若鏞)은 난중일기를 읽고 느낀 소감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내 일찍이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보니, 어머니를 그리워해서 밤낮으로 고심하며 지성으로 슬퍼함이 사람을 감동시킬 만하다. 유성룡(柳成龍)은 ‘이순신이 김귀영(金貴榮)의 사위됨을 사양했으니 그 절조(節操)가 빼어났다.’고 칭찬했으니, 무신도 반드시 덕행을 위주해야 이와 같을 수 있다.”

- 『경세유표(經世遺表)』 무과(武科)조-

난중일기가 전쟁에 관한 일기지만, 오히려 여기에는 이순신의 효심을 알 수 있는 내용들이 많이 들어있다. 이점에서 정약용은 문신은 물론, 무신을 평가하는 기준도 덕행을 기준삼아야 함을 말한 것이다.

난중일기에 대한 번역은 1916년 조선연구회의 주간인 아요야 나기 난메이(靑柳南冥)에 의해 일본어로 처음 시도되었다. 그러나 을미일기 5월 29일까지만 번역하다가 도중에 그쳤기 때문에 번역한 것으로 인정받지 못한 듯하다. 즉, 후대번역본도 마찬가지지만 일부 번역한 초역(抄譯)이나 미상, 오역이 많은 경우에는 역시 인정받기가 어려운 것이다.

어쨌든 후대인들의 이순신에 대한 많은 관심과 연구의 결과로 이순신에 대한 업적은 세계에서 인정받을 만큼 위대한 것이 되었다. 그가 전란의 위기에 보여준 정신이 인류의 보편적 가치의 기준이 되는 도덕성에 부합하기에 더욱 존경을 받는 것이다.

이점에서 그의 활약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난중일기는, 국가에 대한 충성심은 물론이지만, 먼저 부모에 대한 효심을 배울 수 있는 교과서라고 말하고 싶다. 이순신이 자신에게 있어서 어머님은 하늘과 같은 존재였기 때문에, 난중일기 1월 1일자에 어머니를 “천지(天只)”라고 표현했는데, 그의 효심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노승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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