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비망록, 난중일기

이순신은 무과출신의 장수이지만 어려부서부터 문인적인 소양을 쌓았기 때문에 보통의 장수들에게서 볼 수 없는 문필력이 있었다. 특히 그는 중국 동진(東晉)의 왕희지 서체로 거침없이 써내려가는 매우 웅혼(雄渾)한 글씨를 썼다. 아무리 급하게 써도 필획이 정연하고 필법에 어긋남이 없었다. 이러한 필치에서 그의 섬세한 정신력과 강인한 기상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임진왜란이라는 민족의 대수난에 임하여 총이 아닌 붓을 먼저 들었다. 전쟁 상황을 기록하며 전쟁을 대비해 나가기 위한 것이다. 그날그날의 날짜와 날씨, 전쟁상황과 보고 들은 사실 등을 바로《난중일기》에 기록한 것이다. 물론 치열한 전쟁을 치룰 때는 쓰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평상을 찾으면 틈나는대로 실시간 당시의 상황을 기록하였다. 그의 강인한 정신력이 담긴 붓의 힘은 어떠한 위기도 감내할 수 있었다. 

보통의 일기는, 개인이 주관적인 관점에서 작성하다보니 대부분 공정성이 결여되어 있다. 하지만 난중일기는 전쟁의 사실을 그대로 적고 느낀 감정을 진솔하게 기록한 이점이 있다. 중국 명(明)나라 때의 문체이론서인《문장변체(文章辨體)》를 보면, “일기란, 날마다 기록하여 자질구레한 것들을 모두 갖춘 것이 묘미(妙味)다.”라고 하였다. 난중일기는 그 당시 진중(陣中)의 사실들을 망라한 종합적인 기록으로서, 정사(正史)에서 다루지 못한 내용들이 상세히 담겨 있다. 후대에는 이점을 사료적인 가치가 매우 높다고 평가하고 전쟁문학의 백미로 손꼽는다.

이순신의 충혼(忠魂)이 담긴《난중일기》의 의미는 후대에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일신의 안녕보다는 국가과 민족을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인 한 인간의 활약상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순신은 전쟁이라는 암울한 현실 속에서 항상 난중일기와 함께 했기에 전쟁을 더욱 철저히 대비할 수 있었다. 특히 7년 동안 주요 해전에 관한 전후 사정들을 상세히 기록하곤 조정의 명령을 받으며 작전참모와 부하들에게 정보를 일일이 전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끈 업적은 지대하다.
  
특히 이순신에게 있어 정유년(1597)은 고난과 아픔의 시련이 연속된 한 해였다. 억울한 옥살이에 백의종군의 처벌을 받고 남해로 가는 도중 모친 상(喪)을 당하고 붕괴된 조선 수군을 재건하기까지 악순환의 상황에서 파란만장한 경험을 해야 했다. 그는 정유년 4월 13일 모친의 부음(訃音)을 듣고 “길에서 바라보며 가슴 찢어지는 슬픔을 이루 다 적을 수 없어 후에 대강 적었다[路望慟裂, 不可盡記, 追錄草草]”고 하였다. 하늘이 무너지는 비통함을 느끼는 절박한 상황에서도 기록한 것이다.
  
이순신에게『난중일기』는 과거를 성찰하고 내일을 잘 대처하게 해준 비망(備忘) 기록이었다. 항상 승리를 염원하는 마음으로 기록한 정신이 위기 때마다 밝은 지혜로 승화되어 묘책을 내게 해주었다. 또한 그것이 전쟁 뿐 아니라 모든 일상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그는 치열한 전쟁을 치룬 뒤에 또 다시 붓을 잡고 내일을 대비했다. 이러한 기록정신은 계사년 7차 웅포해전을 치룬 뒤에 별지에 기록한 다음의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글로 적기를 생각했으나 바다와 육지에서 매우 바쁘고 또한 쉴 새가 없어서 잊어둔 지 오래였다. 여기서부터 다시 이어 나간다[意於筆硯, 而奔忙海陸, 亦不休息, 置之忘域久矣. 承此]” -『계사일기』-

글 : 노승석 이순신 전문연구가(증보교감완역 난중일기 저자)

노승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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