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타개

   예로부터 현인들은 난세에 출사하지 않고 은거하며 자신을 수양하기에 힘썼다. 오직 현명하게 자신의 몸을 보존하는 명철보신(明哲保身)만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주역》〈건괘䷀〉초구(初九)에 대해 공자(孔子)는 “세상에 은둔하여 근심하지 않고 남의 인정을 받지 못해도 근심하지 않으며, 태평한 세상에는 나아가고 근심스러운 세상에는 물러난다.[遯世无悶 不見是而无悶 樂則行之 憂則違之]”고 말하였다. 이 말이 많은 현인들에게 처세론의 근거가 되었다. 결국 그들이 치세에서는 출사하지만, 난세에는 화를 피하기 위해 현실도피적인 삶을 살았던 것이다.

   예로 중국 서주(西周)의 정치가 강태공(姜太公)은 좋은 때를 기다리기 위해 위수(渭水) 반계(磻溪)에 은거하며 바늘 없는 낚시질을 했다. 마침내 거기서 문왕을 만나 사부로 등용되고 천하를 평정하였다. 그 후 강가의 은사(隱士)들은 낚싯대를 삼공(三公)의 벼슬과도 바꿀 수 없는 귀물로 여겼다. 또한 진말(秦末) 한초(漢初) 네 노인[사호(四皓), 동원공․하황공,․녹리선생․기리계]은 난세의 폭정을 피하기 위해 상산(商山)에 은거하여 약초를 캐며 생활했다. 유방(劉邦)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다가 후에 장량(張良)의 권유로 다시 출사하였다.

   한편 초(楚)나라 대부 굴원(屈原)은 소인들의 참소로 억울하게 파직당하고 상강(湘江)가에 은거하여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다 끝내 멱라수(汨羅水)에 몸을 던졌다. 그가 생전에 지은〈이소(離騷)〉에 “집집마다 쑥을 허리에 가득 차고, 그윽한 난초는 찰 수 없다 한다네[戶服艾以盈腰兮 謂幽蘭其不可佩]”라고 하였다. 쑥은 아첨하는 소인이고 난초는 충직한 군자를 뜻한다. 즉 임금이 간신을 가까이하고 충신을 멀리하는 현실을 비유한 말이다.

   우리나라에는 극렬한 은둔파 현사들도 있었다. 고려 말의 충신 72인은 이성계가 역성혁명으로 창업한 조선 왕조 섬기기를 거부하고 두문동(杜門洞, 개풍군 광덕산 골짜기)에 들어와 세상과 격리되어 살면서 절의를 지켰다. 이처럼 옛 현인들은 난세를 피해 은거하여 치세를 기다리거나 세상과 절연하는 등의 최후의 선택을 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현인들이 따른 용사행장(用舍行藏)의 도이다.

   그러나 이순신이 난세에 처세한 방법은 이들과는 달랐다. 이순신은 무과시험에 합격한 뒤 처세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드러내었다.

“국가에 관리로 등용되면 목숨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이지만, 등용되지 않더라도 농사짓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다. 권세 있는 자에게 아첨하여 헛된 부귀를 누린다면 나의 수치일 것이다.” -최유해,〈충무공행장〉-

이 말은 이순신의 좌우명과도 같은 것인데, 여기에는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각오와 헛된 부귀영화을 탐하지 않겠다는 안분지족의 의지가 담겨 있다. 난세에서 파직을 당한 경우 대부분의 현인은 은거를 택하지만, 이순신의 경우는 그들과 달랐다. 임진왜란 초기부터 지휘관으로서 참전하였고, 정유재란 때는 억울한 옥살이를 하고 석방된 뒤 백의종군의 명을 받고 모친의 상중에 기복(起復, 상중출사)을 하였다.

    “일찍 나와서 길에 오르며 어머님 영연(靈筵)에 하직을 고하고 울부짖으며 곡하였다. 어찌하랴. 천지사이에 어찌 나와 같은 사정이 있겠는가. 빨리 죽는 것만 같지 못하구나. 조카 뇌(蕾)의 집에 가서 조상의 사당 앞에서 하직을 아뢰었다.”                                                            -《난중일기》정유년 4월 19일 -

이순신은 모친의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출정하여 권율의 휘하에서 작전을 도와야 했다. 파직과 백의종군, 그리고 모친의 사망으로 악순환이 연속되는 참담한 상황에서도 국난극복에 대한 강인한 염원을 결코 저버리지 않았다. 칠천량 패전이후 직접 시찰에 나서 잔병과 폐선을 수습하고 수군을 재건하기까지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그의 적극적인 구국활동은 옛 현인들의 처세와는 판연히 다르다. 절의를 지키기 위한 은거도 의미가 있지만, 국난극복의 의지를 관철시킨 노력은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국가와 민족을 위한 대의를 실현한 것이다.

    4백여 년 전 병신년 겨울 조선은 정유재란을 맞을 위기상황에 있었다. 우리는 현재 국정혼돈의 위기에서 세모를 보내고 있다. 새해의 밝은 여명을 맞기 위해서라도 이순신이 항상 경계했던 역천(逆天)의 일들은 지양해야 할 것이다. 진실을 호도하는 위선의 자줏빛이 곳곳을 물들여 정도를 따르는 이들이 위태롭다. 《주역》의 천지비괘(天地否卦䷋)에 “큰 것이 가고 작은 것이 온다[大往小來]”고 했듯이 소인에 의해 군자가 가려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현실도피보다는 보다 더 적극적인 현실타개의 노력이 요구된다. 그래도 산이 아닌 도시에 사는 진정한 대은자(大隱者)는 오늘도 밝은 미래를 구상할 것이다.

글 : 노승석 이순신 전문연구가(교감완역 난중일기 저자)

노승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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