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옥과 상사

   《난중일기》정유년 기록을 보면 1월 1일부터 3월 31일까지 기록이 빠져 있다. 이때 이순신은 정유재란이 발생하면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부하인 요시라(要時羅)의 모함을 받아 왕명거역죄로 3월 4일 투옥되어 28간의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옥중에서 신문을 받을 때 서울에 있던 수군 소속 여러 장수들의 친척들은 이순신이 여러 장수들에게 죄를 돌릴까 매우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이순신은 사건의 전말만을 말했을 뿐 주위 사람을 끌어들이는 말을 조금도 하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탄복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순신은 이러한 긴박한 사건이 발생한 기간 동안에는 일기를 쓰지 못하다가 출옥 당일인 4월 1일부터 다시 붓을 잡았다. 그 일기의 첫 내용은 “옥문을 나왔다[得出圓門]”로부터 시작한다. 여기서 옥문의 원문이 둥근 문의 의미인 “원문(圓門)”으로 되어 있는데, 필자는 둥근 문이 어떻게 해서 감옥문이 되느냐는 질문을 종종 받았다. 1955년 홍기문이 이를 처음 옥문으로 해석했기 때문에 후대의 역자들이 이를 따라 해석하였다. 이것이 결코 잘못된 해석은 아니지만 정확한 의미파악을 위해 “원문”을 “옥문”으로 사용한 옛 용례를 찾아볼 필요가 있었다.

   이에 필자는 중국의 고전 속에서 관련된 내용을 찾을 수 있었다. 중국 양(梁)나라의 소명태자(昭明太子) 소통(簫統)이 지은《문선(文選)》〈강엄․상서〉편에 “하관(下官)이 원문(圓門)에서 애통함을 품었다.”는 구절이 있는데, 이에 대한 여연제(呂延濟)의 주석에 “원문(圓門)은 옥문(獄門)이다.”라고 한 내용을 확인한 것이다. 이에 이 내용을 개정판《교감완역 난중일기》에 처음 반영했는데, 비로소 “원문이 옥문이라는 것”에 대한 정확한 출전을 찾아 궁금해 하는 이들에게 해답을 줄 수 있었다.

   이순신은 백의종군하라는 처분을 받고 4월 3일 서울을 출발하여 남쪽으로 길을 떠난다. 이튿날 아산의 선영으로 달려가 참배하고 조상의 사당에 들러 멀리 떠나감을 고하였다. 옛날에는 이것을 사유를 고한다는 의미로 고유(告由)라고 하였다. 삼도수군통제사직을 파직당한 신분으로 남쪽으로 출정하러가는 사유를 고한 것이다. 《주자가례》〈사당〉조에 보면, “멀리 수십일 이상을 출행하게 되면 사당에 재배분향한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유장(劉璋)은 “장차 멀리가거나 관직을 옮기는 등의 모든 큰 일에는 손을 씻고 분향하여 일을 고한다.”고 말하였다. 이처럼 이순신은 정황이 없는 와중에도 전통적인 예법을 따랐다.

   이때 이순신은 그간 뵙지 못했던 어머니에 대한 불길한 예감을 느낀다. 홀연히 병드신 어머니를 생각하느라 눈물을 흘리며 종을 시켜 여수에서 잘 올라오고 계신지를 알아보게 하였다. 이튿날 4월 13일 아산 바닷길로 어머니를 마중 나갔다. 그런데 어머니는 싸늘한 시신이 된 채 돌아오시어 청천벽력같은 부고를 먼저 받게 되었다. 이에 이순신은 달려 나가 가슴을 치고 발을 굴렀다. 이는 벽용(擗踊)이라고 하는데, 벽(擗)은 가슴을 치는 것이고, 용(踊)은 발로 땅을 구르는 것이다. 이는 자식이 부모의 상에 대한 극도의 슬픔을 형용하는 말이다. 《예기》〈단궁〉에 “벽용은 지극한 슬픔을 나타낸 것이다.[辟踊哀之至也]”라고 하였고, 다산 정약용은《상의절요(喪儀節要)》에서 “벽용은 인간의 감정이 절제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순신도 역시 어머니에 대한 극도의 슬픔을 드러낸 것이다.

   이순신의 생애에 있어서 정유년 4월 5일부터 18일까지 아산에 머문 13일 동안은 가장 절망적이고 참담한 기간이었다. 이때 이순신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나라에 충성을 다하고자 하나 죄가 이미 이르렀고,
                 어버이에게 효도를 하고자 하나 어머니는 돌아가셨네”
                                                                                    -이분,《충무공행록》-

이순신은 평소 한결같은 마음[一心]으로 충성과 효도를 이루고자 하였다. 그러나 자신은 나라에 죄를 지은 죄인이면서 어머니를 여인 상제가 되어 충효를 모두 잃었다며 슬픈 탄식을 하였다. 그리고 남쪽으로 길을 떠나기 위해 어머니의 영전 앞에 울부짖으며 장례도 치루지 못하고 하직을 고하였다. 그는 줄곧 충성이 곧 효도라는 생각에 충효를 이루기 위한 국난극복의 전쟁임무를 잠시도 저버리지 않았다. 마침내 울며 따르는 지인들과 백성들의 위로를 받으며 출정의 길에 올랐다.

                 글 : 노승석 이순신 전문연구가(교감완역 난중일기 저자)

노승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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