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거울

   처음에 시작은 쉬우나 유종의 미를 거두기란 쉽지가 않다. 공자는 “처음은 누구나 시작할 수 있지만, 끝까지 잘 마치는 경우는 드물다[靡不有初, 鮮克有終].”고 하였다.《공자가어》 처음 먹은 초심(初心)을 관철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뜻이다. 또한 공자는 “나의 도는 하나로 관철되어 있다[吾道一以貫之].”며,《논어》 인(仁)의 실천을 항상 강조했다. 공자는 한평생 초심의 뜻을 얻지 못했어도 조금도 흔들림 없이 천하를 주유하며 제후들에게 항상 도덕정치를 강조했다.

    이순신의 초심은 어떠했을까. 그는 어려서부터 성격이 곧고 대범하여 사소한 일에 얽매이지 않았고, 주변에 억울한 일을 당한 이가 있으면 반드시 가해자를 찾아가 굴복시키고 마는 의협심이 강했다. 어른이 되어서는 항상 근신하는 선비와 같았고, 출세를 위해 남에게 아부하지 않았다. 32세 때 과거에 급제하고는 권력 있는 귀족들을 찾아다니지 않아 추천해준 사람도 없었다.
 

   이순신이 건원보(乾原堡) 권관(權管)에 있으면서 훈련원의 임기가 다 찼기에 참군(參軍, 정7품)으로 승진하였다. 이순신이 비록 명성이 자자하였으나 벼슬을 위해 높은 벼슬아치를 찾아다니는 것[奔競]을 좋아하지 않아서 마음대로 벼슬에 나가지 못하니 논하는 자들은 이를 애석하게 여겼다. 
                                                                                                                                              - 이분, 『충무공행록』-

북방의 오랑캐 울지내 정벌에 공을 세웠지만, 상관인 김우서(金禹瑞)가 시기하여 포상이 무산되고, 겨우 훈련원의 참군으로 승진되었던 것이다. 또한 상관에게 직언하는 성격이라 벼슬길이 순탄치 못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이순신은 낮은 지위에 오래 있으면서도 부귀권세에 영합하지 않고 설사 억울한 일을 당해도 자신이 해야 할 일에만 충실히 하는 성격이었다.

    이순신의 초심은 정의를 위한 의협심과 부귀권세에 초연한 자세이다. 전란 중에는 이것이 결사항전의 의지로 표출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일심(一心)이었다.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경상우도 진영이 함락되고 원균이 이순신에게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이순신은 부하장수들과 옥포로 출동하여 일심의 자세로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도록 지휘하였다. 그 결과, 많은 왜적들을 죽이고 왜선 26척을 분멸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이러한 그의 노력과 정신력은 7년간의 전쟁 동안 계속 유지되었다.

    이순신에게 있어서 장점은 궁할수록 더욱 강해지는 장부다운 기상이 있는 것이다. 불리한 상황에서도 오히려 더 강해졌다. 건괘(乾卦)가 이괘(離卦)를 만나면 화극금(火剋金)이 되어 쇠할 것으로 보이나 오히려 불속에서 쇠가 단련되어 더욱 강해지는 것과 같았다. 매번 위기 때마다 그의 일심이 정신적 지주가 되어 백절불굴의 힘을 준 것이다.

    그러나 그의 강한 일심은 모친 상사에서 약해지고 말았다. 모친상을 당하고서 “나의 일심였던 충효를 여기서 모두 잃었다[吾一心忠孝, 到此俱喪矣].”고 한 것이다. 자식으로서 천붕지통에는 천하의 명장 이순신도 마음을 가눌 수가 없었다. 《난중일기》에는 돌아가신 모친에 대한 그리움이 역력히 드러나 있다. 인간된 자식이라면 절제하기 어려운 일이므로 그런 모습은 당연한 것이다. 억울하고 원통한 상황임에도 그는 다시 전쟁터로 나아갔다. 일심이 다시 재기할 수 있는 힘을 준 것이다. 

    훗날 숙종 때 형조판서 이유(李秞)는 어느 날 이순신의 〈한산도 야음〉시에 차운하는 시를 지었다. 그리고 자신이 북방 수루에 파견되어 근무하는데 괴로움을 느낀 나머지 이순신의 나라를 걱정했던 일심을 간절히 생각하며 웅심(雄心)을 키웠다. 이순신의 일심이 남에게 시련과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현실에 최선을 다하게 하는 힘을 주었다. 이러한 점에서 그의 일심은 오늘날 혼탁한 세상에 진정한 밝은 거울이 되어 줄 것이다.

                 글 : 노승석 이순신 전문연구가(교감완역 난중일기 저자)

노승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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