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례를 다하는 정성

   1597년 4월 1일 이순신이 억울한 옥살이를 마치고 풀려났다. 3월 4일에 투옥되었다가 27일 만에 나왔는데, 이때 합천 초계에 있는 권율의 막하로 들어가 백의종군하여 공을 세우라는 명을 받았다. 이 날부터 복직되기까지 120일 간의 백의종군의 여정에 올랐는데, 그간 쓰지 못한 《난중일기》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출옥한 당일에는 지인들을 만나 술에 흠뻑 취했다. 유성룡을 만나 새벽까지 이야기가 하고, 3일 남쪽을 향해 백의종군의 길을 떠났다.

    5일 아산의 선영으로 가서 절을 올리고, 조상님과 장인 장모의 사당에 들러 배례를 올려 멀리 떠나감을 고하였다. 이는 사당에서 남쪽으로 출정하러 감을 고유(告由)한 것이다. 《주자가례》〈사당〉조에, “멀리 수십일 이상을 출행하게 되면 사당에 재배 분향한다.”고 하였다. 이순신은 유학을 배웠기 때문에 백의종군하는 와중에도 출행하는 자의 예를 다한 것이다.

   그 후 친지와 친구들이 찾아와 위로해 주었고 의금부 도사都事가 옆에서 수행했다. 며칠 후 이순신은 아산 해암蟹巖(게바위)의 바닷길에서 종 순화順花를 통해 어머니의 부고訃告를 들었다. 이에 이순신은 급히 달려가 가슴을 치고 뛰며 통곡했다. 이 별좌가 와서 관을 짜고 다음날 저녁에 입관하였다. 영구를 상여에 싣고 아산 집으로 돌아와 빈소를 차렸다.

   《난중일기》 정유년 4월 15일자를 보면, “늦게 입관(入棺)하는데 직접 해준 오종수(吳終壽)가 정성을 다해 상을 치르게 해주니 뼈가 가루가 되도록 잊지 못하겠다. 관에 넣는 물품은 후회함이 없게 했으니 이것은 다행이다.[晩入棺, 親執吳終壽, 盡心粉骨難忘. 附棺無悔, 是則幸也.]”라는 내용이 있다. 여기에 나오는 부관무회(附棺無悔)에 대해 새롭게 고증을 하였는데, 이는 “부신부관 성신물회(附身附棺 誠信勿悔)”에서 나온 말로, 염습과 장례 때 관에 넣는 물품을 정성스럽게 하여 후회가 없게 한다는 뜻이다. 《예기》〈단궁〉에 “자사(子思)가 말하기를 ‘상을 당한 지 3일 만에 염할 때 시신에 넣는 물품과 3개월 만에 장사할 때 관에 넣는 물품은 모두 정성스럽고 신실하게 하여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하였다.

   4월 5일부터 18일까지 아산에 머문 13일 간은 이순신의 생애에 있어 가장 절망적이고 참담한 시기였다. 이때 이순신은 늘 그리워했던 어머니를 잃고 죄인의 몸이 다시 상제가 되는 악순환의 상황 속에서도 왕명을 받들고 전쟁터로 나아가야 했다. 어머니와 전쟁 사이에서 인간의 도리를 실천해야 한다는 한결같은 초심으로 어느 한 쪽도 포기하기 어려운 현실을 갈등하며 울분을 토로했다.

    이때에 이순신이 보여준 인고의 정신과 백절불굴의 모습은 7년 전쟁 중에서 가장 위대했다. 고난과 슬픔으로 점철된 자신의 비운적인 운명을 국난극복의 대의를 실현하는 모습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또한 어떠한 위기상황에도 굴하지 않는 초극의 의지를 보임으로써 범인이 미칠 수 없는 경지에서 위대성을 드러내었다. 아산은 이순신의 선산이 있는 곳이자 어머니의 고향으로서 전쟁 중 이순신에게 항상 불굴의 의지를 지탱케 했던 그의 정신적인 본산이었던 것이다.

     글: 노승석 이순신연구가(교감완역 난중일기, 이순신의 승리비결 저자)

노승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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