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요한 점

 《난중일기(亂中日記)》는 이순신이 7년간의 전쟁 중에 직접 체험한 사실들을 기록한 진중일기이다. 친필 초고본을 보면 급박한 전쟁을 치룬 해일수록 필기상태가 심하게 흘려져 있다. 특히 《임진일기》와 《계사일기》, 《정유일기》에서 그러한 현상이 두드러지는데,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급박했는지를 짐작케 한다. 큰 전쟁이 일어났던 해에 작성된 일기는 분량이 일정하지 않고 수정과 삭제가 반복되고 누락과 훼손상태가 심하다.

  1693년(숙종 19) 이후 쯤 미상인에 의해 이순신과 관련된 사료들을 모은 필사본 《충무공유사》가 만들어 졌다. 여기에는 《난중일기》를 초록한 〈일기초日記抄〉가 있는데, 이는 불과 325일분의 일기를 담고 있으나 기존의 초고본에 없는 일기 32일치가 들어 있고, 일종의 교감형태로 첨지(籤紙)를 붙여 적은 글자들도 있기 때문에 《난중일기》정본을 만드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1795년 정조 때 간행된 《이충무공전서》의 《난중일기》는 초고본과 비교하면 아쉽게도 내용상의 차이가 많다. 일부 내용이 누락되거나 산절되고 변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날짜에 있어서는 초고본보다 더 많고 초고본에 없는 내용도 실려 있다. 전서본의 판본이 비록 불완전한 형태로 간행되었지만, 국가사업으로 최초로 간행된 점에서 의미가 크다.

  그 후 1935년 조선사편수회(이마이다 기요노리(今井田淸德) 회장)가 《난중일기》전편을 다시 해독하여 《난중일기초》를 간행했다. 글자의 위치와 크기를 그대로 살려 지우거나 삭제한 글자를 그대로 표기하고 초고본의 원형에 가까운 해독을 하였다. 그러나 원문의 오기는 교감하지 않았고 오독한 글자도 있었다. 《난중일기초》를 작업할 때 만들어진 초고인《난중일기초본》(국사편찬위원회 소장)이 있지만, 이는 역시 오자와 사전에 없는 글자들이 남아 있어 한계가 있다. 예컨대 필자가 최초로 해독한 내산월(萊山月)의 내자는 사전에도 없는 대죽변(竹)으로 되어 있다.

   본래 교감(校勘)이란, 판본상의 오류를 바로잡는 교정(校正) 작업이다. 중국 북경대학의 예기심(倪其心)교수는 “교감작업의 궁극적인 목표는 원문을 원래대로 복원하는 것(存眞復原)이다.”라고 말했다. 결국 교감은 원문의 오류를 바로잡아 정본을 확정하는 것이다. 필자는 《난중일기》정본을 만들기 위해 〈일기초〉·전서본·《난중일기초》등의 이본들을 모두 정리하여 비교분석하였다. 전서본과 《난중일기초》를 비교하면 2천여 곳의 차이가 나는데, 이러한 차이점들을 적시하여 모든 오류를 바로잡아 번역본《교감완역 난중일기》와 원문《교감원문 난중일기》를 간행한 것이다.

  14년 전에 만들어진 국가기록유산 사이트 DB본 《난중일기》는 입력과정에서 전산상의 오류로 잘못된 오타들이 있었는데, 복합적인 프로그램의 문제로 쉽게 수정되지 못했다. 필자는 원문책자에 이것까지 반영하여 오타들을 바로 잡았는데, 이것은 오타 수정인 것을뿐, 교감대상은 아니었다. 최근 개정판을 내기까지 10여 년이 걸렸는데, 이처럼 난중일기 교감작업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필자가 거의 완벽에 가까운 판본과 번역본을 만들어 놓은 상태에서 이 이후에 나온 번역서들에 대해서는 강호제현들이 그 가치를 품평을 하는데 신중을 기해야할 것이다.

  《난중일기》교감작업은 결코 임진왜란사만을 안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고 초서와 고전을 수십 년 이상 연구해야 한다. 그러한 학문적인 수련이 없이 단순한 열정만을 가지고 교감을 시도한다면 오히려 기존에 바르게 잘 되어 있는 내용을 오독으로 만들어 혼란을 초래할 것이다. 초서 해독과 교감에 관한 문제는 고전연구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점이다. 중국 청나라 때 학자 단옥재(段玉裁)는 “고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없으면 바르게 된 것을 잘못된 것으로 만들어 심각한 혼란을 초래한다.”고 했다. 이는 고전번역 전문가들이 교감단계에서 어려워하는 매우 긴요한 점을 지적해준 말이다.

                            글: 노승석 이순신 연구가(교감완역 난중일기 저자)

노승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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