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심이 천심이라 했듯이 한 나라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민생안정에 힘써야 한다. 백성의 뜻을 거스르고서는 나라가 발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백성을 잘 보살피기 위해서는 위정자는 만인이 공감할 수 있는 올바른 도리를 따라야 한다. 중국 주초(周初)의 정치가 강태공은 “상도(常道)를 따라 보살피면 백성이 편안해진다[因其常而視之, 則民安].”하였다(《육도》
《난중일기》1597년 5월 21일자에 “죽을죄도 아닌데 누차 형장을 맞아 거의 죽게 되었다가 물건을 바치고서야 석방 되었다. 안팎이 모두 바치는 물건의 많고 적음에 따라 죄의 경중을 정한다. 이것이 이른 바 ‘백전(百錢)의 돈으로 죽은 혼을 살린다[一陌金餞便返魂].’는 것이다”라는 내용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이 관아에 바치는 물건의 많고 적음에 따라
1596년 9월 8일 이순신은 이날이 세조(世祖)의 제삿날이라서 새벽 조반에 올라온 고기반찬을 먹지 않고 도로 내놓았다. 자고로 국가나 조상의 기일(忌日)에는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 예법이었다. 아침을 먹은 뒤 길에 올랐는데 감목관과 영광군수(김상준)를 만나고 국화 떨기 속에 들어가서 술 몇 잔을 들이켰다. 여기서 자연의 정취를 느낄 줄 아는 이순신의 문인
공인중개사를 단 몇 개월만 공부하고 한번에 합격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합격점에 근접한 점수를 얻고도 몇 해씩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 경록의 수험전문가는 “쉽다는 운전면허시험도 시험에 맞지 않은 공부를 하면 떨어진다. 반대로 공인중개사시험도 시험에 맞는 공부를 하면 어렵지 않게 합격한다”고 말한다.우리나라 부동산전문교육의 모태(母
1597년 4월 1일 이순신이 억울한 옥살이를 마치고 풀려났다. 3월 4일에 투옥되었다가 27일 만에 나왔는데, 이때 합천 초계에 있는 권율의 막하로 들어가 백의종군하여 공을 세우라는 명을 받았다. 이 날부터 복직되기까지 120일 간의 백의종군의 여정에 올랐는데, 그간 쓰지 못한 《난중일기》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출옥한 당일에는 지인들을 만나 술에 흠뻑
인간사회에서 인간의 인성과 도덕에 대한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항상 중요시되어 왔다. 그때마다 유학(儒學)에서 제시하는 덕목이 절대적인 가치의 기준이 되었고, 도덕추구를 위한 심성수양이 인간생활의 보편적인 방편이 되었다. 역대의 역사적인 위인들이 위대하게 된 이유도 바로 심성수양을 통해 항상 도덕실천에 힘썼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금에 관통하는 규범을 실현하기
이순신 장군이 전쟁 중에 《삼국지》를 읽고 참고했다고 하면 사람들은 쉽게 믿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나라의 운명이 달린 전쟁을 하는데 소설에 의존할 리가 있겠느냐는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록이란 것은 거짓말을 할 수 없다. 몇 년 전 필자가 《난중일기》에 적힌 인재의 중요성을 의미하는 구절의 출처를 중국 명초의 소설가 나관중이 지은 《삼국지연의》
인간 사랑의 정신을 실천하는 것은 부모에게 효도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효(孝)가 백 가지 행실에 근본이 되기 때문에 그와 같이 말한다. 효(孝)자에는 아들이 늙은 부모를 받든다는 의미가 있다. 공자(孔子)는 “효도가 덕(德)의 시작이다.”라고 했고(《공자가어》), 제갈량은 “인간사랑은 부모사랑에서부터 시작한다.”고 하였다.《제갈량집》 부모에게 효도할 줄
《난중일기(亂中日記)》는 이순신이 7년간의 전쟁 중에 직접 체험한 사실들을 기록한 진중일기이다. 친필 초고본을 보면 급박한 전쟁을 치룬 해일수록 필기상태가 심하게 흘려져 있다. 특히 《임진일기》와 《계사일기》, 《정유일기》에서 그러한 현상이 두드러지는데,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급박했는지를 짐작케 한다. 큰 전쟁이 일어났던 해에 작성된 일기는 분량이 일정하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에는 저마다 타고난 본성이 있다고 한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만이 본성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고 하찮은 미물에도 본성이 있는 것이다. 때문에 모든 만물은 자신이 가야할 길을 따라야 올바른 삶을 유지할 수 있다. 옛 선현들은 이것을 당연한 이치로 생각하여 “솔성(率性)”이라고 하였다. 즉, 본성을 따르는 것을 모든 만물이 가야하는 길로
임진왜란이 발생했을 때 전쟁을 예견하는 주역점이 유행하였다. 이 때 전통적인 주역점을 간편화한 새로운 점법이 등장했는데, 중국에서 유래한 척전법(擲錢法, 동전점)과 이순신이 주로 사용한 척자점(擲字占, 윷점)이 있었다. 이는 일종의 실전역으로서 길흉을 예견하는데 주로 사용되었다. 특히 척전으로 점치는 《초씨역림焦氏易林》이 유행했는데, 이 책은 전한前漢 소제
임진왜란 당시 국난극복의 주역이었던 이순신은 우리의 역사에 불세출의 위인으로 자리매김한지 오래이다. 범인을 초월하는 그의 위대성 때문에 현대인들은 4백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의 자취를 기리고 어렵고 힘들 때마다 줄곧 마음속으로 ‘충무공 이순신’을 떠올리며 자신의 위안을 삼는다. 이처럼 그가 위기 때마다 첫 번째로 떠올리는 인물이 된 것은 치세를 위해 그와
처음에 시작은 쉬우나 유종의 미를 거두기란 쉽지가 않다. 공자는 “처음은 누구나 시작할 수 있지만, 끝까지 잘 마치는 경우는 드물다[靡不有初, 鮮克有終].”고 하였다.《공자가어》 처음 먹은 초심(初心)을 관철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뜻이다. 또한 공자는 “나의 도는 하나로 관철되어 있다[吾道一以貫之].”며,《논어》 인(仁)의 실천을 항상 강조했다. 공자는 한평
인간사랑의 정신을 실천하는 것은 남에게 덕(德)을 베푸는 덕행에서부터 시작한다. 학문 연구자들은 인격수양을 위해 덕행을 배우고, 정치인들은 인심을 순화하고 풍속을 바로 잡기 위해 덕치를 추구한다. 중국 진(秦)나라 말기 장량(張良)에게 병서를 전했다는 병법가 황석공(黃石公)도 “우선으로 해야 할 일은 덕을 닦는 것이 제일 우선이다[先莫先於修德].”라고 하였
이순신은 아들과 조카들의 전송을 받으며 남쪽으로 길을 떠났다.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되기까지 백의종군의 여정에 오른 것이다. 익산 관노의 집과 남원 이희경의 종집에서 유숙했다. 그후 이순신은 도원수 권율이 순천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순천 송원으로 갔다. 권율은 군관 권승경을 보내어, “상중에 몸이 피곤할 것이니, 기운이 회복 되는대로 나오라”고 하였다. 상
올해는 명량해전이 일어났던 정유(丁酉)년을 420년 만에 맞은 7갑주년의 해이다. 그래서 정유년의 의미가 남다르게 느껴진다. 이 ‘丁酉’를 주역 상수학에서는 뇌택귀매(雷澤歸妹䷵)로 풀이한다. 주역 괘효가 6효로 되어 있으므로 이 정유의 숫자를 6으로 나누면 2가 남으니 두 번째 효인 구이(九二)가 동했다고 한다. 이 괘효의 점사로써 괘풀이를 하
1597년 9월 16일 왜선들이 명량해협의 울돌목[鳴梁]을 거쳐 곧장 조선수군의 진지가 있는 우수영을 향하자, 이순신은 수군에게 출동 명령을 내렸다. 이에 왜군의 세키부네(關船) 133척이 수군의 배 13척을 포위하였고, 여러 장수들은 중과부적의 상황임을 알고 회피하려고만 하였다. 이순신은 부하들을 타이르면서 “적이 비록 천 척이라도 감히 우리 배를 바로
《난중일기》정유년 기록을 보면 1월 1일부터 3월 31일까지 기록이 빠져 있다. 이때 이순신은 정유재란이 발생하면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부하인 요시라(要時羅)의 모함을 받아 왕명거역죄로 3월 4일 투옥되어 28간의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옥중에서 신문을 받을 때 서울에 있던 수군 소속 여러 장수들의 친척들은 이순신이 여러 장수들에게 죄를 돌릴까 매
1594년 정초에 이순신은 여수 송현마을 내 고음내에 계신 어머니를 찾아 뵈었다. 남의길(南宜吉)과 윤사행(尹士行), 조카 분(芬)이 동행했다. 그 당시 80세인 노모는 숨을 가쁘게 쉬어 살아 계실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생각에 이순신은 그만 감춰진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하룻밤 묵은 뒤 이순신은 전쟁 중이라 오래 머물 수 없어 어머니께 하직을 고했다. 그러